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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산업이 10월을 기억하는 방법

2022.10.17 03:00 입력 2022.10.17 03:01 수정
이한솔 한국사회주택협회 이사장

지난 10월5일,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한 박은빈 배우가 ‘주 52시간 근무제’를 언급했다. 방송 현장의 노동권 주제도 아닌 박은빈 배우의 리더십에 관한 이야기였다. 촬영 시간이 길어질 수도 있던 상황에서 박 배우의 영향력 덕분에 스케줄이 차질없이 진행되었다는 일화였는데, 주 52시간 준수는 이미 고정값이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근로기준법을 지키는 것 자체가 뉴스였던 드라마 현장을 돌이켜보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이한솔 한국사회주택협회 이사장

이한솔 한국사회주택협회 이사장

5년 전, 촬영 중 스태프가 다쳤는데도 ‘한국에서는 지킬 것 다 지키면 아무것도 못 찍는다’고 당당하게 말하던 방송업계 고위관계자가 떠오른다. 하지만 업계의 오래된 관행과 ‘슈퍼갑’들의 여러 방해에도 불구하고, 카메라 뒤의 사람을 존중하기 위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방송 스태프의 근로자성을 인정받고 살인적인 노동시간을 줄이는 등 많은 변화를 이뤄냈다. 오히려 산업 자체의 체질이 개선되니, 5년 전의 비관론이 무색하게 한류 드라마는 더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물론 방송 현장이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 KBS 드라마 <미남당> 현장에서는 스태프를 집단 해고하는 사태가 있었다. SBS에서도 PD 한 명이 세상을 떠난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오기도 했다. 대중문화 전반으로 확장하면 비극적인 일들은 더욱 빈번하게 반복되고 있다. 싸이의 ‘흠뻑쇼’ 공연에서는 시설물 해체 작업 중 사망사고가 발생했다. 웹툰 작가의 유산 및 과로사 소식도 끊임없이 들려온다. 아동·청소년으로 종사자의 범위가 넓어지고 있는 유튜브와 웹소설의 영역은 산재를 방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제도조차 없는 사각지대이다.

한류의 미명 아래 대중문화예술산업의 규모는 비대해졌지만 만드는 사람의 대부분은 기계처럼 혹사당하고 있다. 종사자들은 그저 마감의 압박 속에 쓰러지기 직전까지 일하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오스카상을 수상한 영화 <기생충>, 아동 출연진 5명당 1명의 ‘아동인권보호관’을 배치한 뮤지컬 <마틸다>, 주 2회 편성을 절반으로 줄이고도 흥행에 성공한 <슬기로운 의사생활> 등 사람을 쥐어짜지 않는 현장에서 멋진 작품이 나올 수 있다. 제2의 <오징어 게임>을 계속해서 보고 싶다면, 정치인, 정부, 종사자, 산업 전반이 함께 고민해야만 하는 방향은 분명하다.

오는 26일은, tvN의 이한빛 PD가 6년 전 방송 현장의 케케묵은 문제를 지적하며 세상을 떠난 날이다. 그의 죽음을 통해 우리 사회는 방치되었던 방송 스태프의 현실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의 죽음을 사회적으로 기억하고자 한다면, 드라마 현장의 주 52시간 준수에 그쳐서는 안 된다. 아직도 무방비 상태인 일터가 너무나 많다. 대중문화예술산업에 적어도 10월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 잠시 멈추고 기억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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