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시작과 동시에 일을 하게 되었다. 정확히 9개월 만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30년 가까이 쉼 없이 달려온 나에게 9개월은 ‘벌써 이렇게 지났어?’보다는 ‘아직 얼마 안 됐네’로 느껴지는 시간에 더 가까웠다. 그러나 슬금슬금 찾아온 기회를 제때 잘 엮는 것도 중요한 법.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출퇴근 직장인이 되었다.
퇴사하고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아, 봄에 퇴직하길 잘했어’였다. 봄의 부드러운 햇살과 바람이 지친 심신을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다. 북한산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카페에서 모닝커피를 마시며 햇살을 즐겼다. 평일에도 사람이 이렇게 많은 것에 놀라면서. 해외에 사는 친구가 다녀가라고도 했고, 이런 기회에 책 한 권 내자고 제안한 분도 계셨다. 정말 감사했지만 모두 내키지 않았다. 에너지가 방전된 느낌이랄까.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고 사람들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웬만하면 뉴스도 피하고,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컴퓨터 근처에도 안 갔다. 가벼운 산책과 집 정리, 가까이 사는 친구들과 주말 브런치, 좋아하는 가수의 덕질만으로도 크게 지루하지 않았다. 간간이 독서와 글쓰기, 강의와 외부 회의는 참여하면서 본업에 대한 감은 유지하려 애썼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 즈음부터 마음속에서 꿈틀대는 작은 에너지가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중장년 정책 기획자로 살아온 지난 10여년이 주마등처럼 복기되면서 여러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성취와 보람이 컸던 만큼, 좌절과 안타까움도 비례했다. 늘 열심히는 했지만, 어디로 향해가는 건지 좌표를 잃은 기분이 들 때도 많았던 것 같다. 중장년 정책이 전국적 어젠다로 빠르게 확산되기는 했지만, 정책환경 변화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도 보았다. 우리 사회 중장년 정책에 대한 관점과 철학의 부재에서 오는 결과이리라.
한발 떨어져서 보니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중장년 세대가 세대 간 연결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어젠다를 재구성하는 것. 좀 거창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꼭 필요한 일로 보였다. 이런 문제 인식에 공감하는 몇몇 분들과 스터디도 하고 관련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다보니 무미건조했던 내면에 조금씩 생기가 돌고 도전의식 같은 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모두의 인생 전환에 꼭 필요한 한국형 갭이어, 나이 듦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전환, ‘좋은 어른’으로서 미래세대와 연대하는 중장년층의 활동. 이런 과제들을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모델로 만드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지금 운 좋게 그런 기회가 온 것이다.
비전, 이상과는 별개로 마음의 결심을 굳히기까지 기대 연봉과 현실의 갭 사이에서 갈등이 하나도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같은 비전과 뜻을 가지고 함께할 동료들이 더 중요했다. 출근 일주일 차인 지금 나에게 시급한 건 공기업 근무 7년간 알게 모르게 몸에 밴 체질과 마인드를 바꾸는 일인 것 같다. 강의 때마다 강조하던 ‘몸과 마음, 사회적 지위 변화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심플하게 단순하게 힘 빼며 사는 연습’은 나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열심히’ 못지않게 ‘즐겁게’ 하기, 나만의 ‘겨를’을 반드시 만들기! 그래야 오래 즐겁게 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