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2023.02.21 03:00 입력 2023.02.21 03:01 수정

최근 미국 정가에는 정치인 한 명의 건강이 관심의 대상이다. 사상 초유의 80대 재선 출마가 유력한 조 바이든 대통령 얘기가 아니다. 주인공은 초선 연방 상원의원 존 페터만(민주당, 펜실베이니아주)이다. 페터만은 작년 5월 민주당 경선 직전 유세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뇌졸중을 겪었다. 남편이 하는 말이 미묘하게 이상해진 것을 알아챈 아내가 바로 차를 돌려 응급실로 향하지 않았으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한동안 정치 활동을 중단하고 치료와 재활에 전념했지만, 당내 경선과 11월 중간선거에서 승리하여 상원에 입성했다.

유정훈 변호사

유정훈 변호사

극적으로 살아남았지만 후유증은 남았다. 말이 약간 어눌해진 것은 큰 문제는 아니었으나, 토론이나 인터뷰에서 상대방의 발언을 알아들으려면 자막이 필요했다. 뇌의 청각 정보 처리 기능이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대보다 회복 속도가 느려 올해 1월 임기 개시 후에도 자막 생성기를 사용해야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페터만의 사례는 공직자의 건강과 장애에 관한 논의를 불러왔다. 선출직 공직자의 건강이 직무 수행을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한 유권자의 알 권리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가장 민감한 개인정보인 건강 상태를 어디까지 공개해야 하는지, 질병 혹은 장애가 의원의 직무 수행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유권자를 대변하고 정부기관, 언론과 수시로 소통해야 하는 상원의원이 자막 생성기에 의존하는 점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지만, 미국 의회는 그 자체가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분위기였다. 이라크전에 참전했다 헬리콥터 추락으로 다리를 잃어 휠체어를 사용하는 태미 덕워스 상원의원(민주당, 일리노이주)이 당선되자, 상원은 그녀를 위해 경사로를 새로 설치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던 경험도 있었다. 덕워스의 휠체어와 페터만의 자막 생성기를 달리 볼 이유는 없다는 것이고, 동료 의원들은 자신들이 페터만의 자막에 적응하면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지난 2월16일 페터만 의원실은 그가 우울증 치료를 위해 자진하여 입원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과거에도 비슷한 증세를 겪은 적은 있지만, 뇌졸중 후유증으로 의사소통의 어려움이 지속되며 증상이 심해져 이런 결단을 했다는 설명이다. 의회는 소속 정당을 불문하고 정치인으로서 밝히기 힘든 사실을 고백하고 치료를 받기로 한 페터만의 용기를 인정하고 그의 쾌유와 조속한 복귀를 기원하고 있다. 1972년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 토머스 이글턴 상원의원이 정신과 진료를 받은 전력이 드러나 19일 만에 후보에서 사퇴했던 일과 비교하면, 50년 사이에 미국 사회는 이만큼 진일보했다.

우리 국회에서도 비슷한 흐름은 일어나고 있다. 시각장애인 김예지 의원이 당선되며 안내견이 국회 본회의장까지 출입하게 되었고, 우리는 안내견과 함께 공공장소에 출입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법에 보장된 권리라는 점을 실제로 알게 되었다. 이탄희 의원은 사법농단 사태로 얻은 공황장애를 고백하며 치료를 위해 청가를 냈고, 2개월 후 복귀하여 활발하게 의정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입법부에서 나타난 이런 현상은 의미가 있다. 헌법기관은 헌법에 근거를 두고 설치되어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헌법기관이기에 그 자체의 구성과 활동에서 헌법적 가치를 구현할 책무가 있다. 영구적 장애이든 아니면 질병 후유증으로 겪는 일시적 장애이든 그로 인해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되고, 예컨대 휠체어와 경사로처럼 적절한 개인장비와 그에 맞는 인프라를 통해 장애인의 활동에 지장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같은 정신적 어려움이 자기 책임을 저버린다고 비난받을 이유도 아니고 직업을 포기해야 할 근거가 되어서도 안 되며, 필요한 치료기간을 가진 후에 복귀할 수 있어야 한다.

일단 선출되면 임기가 보장되는 국회의원이기에 누리는 특권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가 헌법적 가치를 실현한 사례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그런 사례가 의원에게만 적용되는 예외가 아니라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보장되도록 국회가 조치를 계속하면 된다. 미국에서도 페터만 상원의원의 사례가 유권자의 경험과 인식을 어떻게 바꿀지, 향후 선거나 정치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미지수인 부분이 많다. 하지만 이런 사례들을 통해 사회 전반의 사고와 인식이 확장되길, 그래서 비슷한 일이 생겼을 때 서로에게 이렇게 얘기해 줄 수 있는 사회로 한발 더 나아가길 바란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숨기지 않아도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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