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화석’이라는 말이 있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처음 쓴 말로 투구게나 실러캔스처럼 화석으로만 남은 고대의 생물종과 흡사한 외견을 가지고 있으면서 현존하는 다른 근연 분류군이 존재하지 않는 생물종을 말한다. 대학이나 회사 등의 사회 조직에서 오랜 역사를 직접 경험한 나이 많은 사람을 살아 있는 화석이라 부를 때도 있다. 반대로 지금 여기에서 함께 살고 있지만 마치 여기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존재도 있다. 바로 ‘미래 세대’다. 지금 여기에 있는 어린이와 청소년은 미래 세대로 호명된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에 명시된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난 아기도 주권자이다. 지금 살아 숨 쉬며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주권자를, 시민들을 왜 미래 세대라고 이름 붙여 그들의 이야기와 삶을 현재가 아닌 미래로, 미정의 도래할 무엇으로 유예하는 것인가. 어린이와 청소년은 자주 미성숙한 존재, 훈육이 필요한 존재, 유해한 것에 선동될 수 있는 존재로 규정된다.
최근 공립도서관은 물론 작은도서관을 대상으로 도서 전수조사 바람이 불고 있다. 특정 도서를 소장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해당 도서의 대출을 막거나 보존서고로 옮기도록 지시한다고 한다. 사실상 정부의 공공도서관 도서 검열이 아닌가 의심된다. 도서관마다 지적받은 도서 목록을 모아보면 공통점이 드러난다. 대부분 어린이, 청소년 대상 도서로 몸, 성, 성평등, 성교육, 젠더 주제의 책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자신의 몸과 몸의 변화와 차이, 성평등과 젠더정체성을 공공도서관에서 알 수 없다면 어디에서 알 수 있을까?
정부는 여성가족부의 내년도 초·중·고교 학생의 성 인권 교육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이뿐만 아니라 청소년 프로그램 공모사업, 청소년 어울림마당, 청소년 동아리 지원 등의 예산도 전액 삭감됐다.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다양성 확산사업 예산 역시 전액 삭감됐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참여하는 다양한 활동이 내년에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못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지난 8월26일, 뜨거운 여름날 부산민주공원에서는 ‘청소년 민주주의 상상한마당’을 열었다. 청소년이 직접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 진행까지 했다. 민주주의를 주제로 인권, 평화, 환경,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등 다양한 주제를 상상하고 단편 영화, 보드게임, 리사이클링 소품 만들기, 자작곡 공연 등 각기 다른 형태로 표현했다. 서로의 부스를 방문하며 교류하고 햇빛보다 뜨거운 열기를 뿜는 청소년들을 보며 흐뭇함이 아니라 동료 시민으로서 존경심이 들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미래 세대로 칭송하며 미래 세대가 살아갈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지금의 우리가 더욱 힘써야 한다고들 말한다. 이때 어린이와 청소년은 동시대를 살고 있는 동료 시민에서 배제되고 시민으로서의 권리는 유예된다. 이미 도래한 미래를 더는 미뤄서는 안 된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동료 시민이며 이들이 주체적으로 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부가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사자인 ‘현재’ 세대, 어린이, 청소년을 배제하지 않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