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 만난 친지들은 불안감을 말하고 있었다. 한국의 미래가 오리무중이라는 것이다.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에서 우리가 이렇게 손 놓고 있어도 되나 하는 걱정이 만연해 있다. 한·미·일은 결속했지만 북한은 고립에서 벗어나고 있다. 한국의 올해 성장률은 미국·중국은 물론 일본에도 미치지 못할 것으로 전망된다. 일련의 사회적 붕괴 현상에 대해서도 무대책이다. 정부·정치권·시민사회에서 모두 거대한 변화에 대응하는 논의가 나오지 않고 있다. 어떻게든 큰 흐름을 짚어내야 할 시간이다. 진보개혁 세력에서도 체제적 인식과 대안에 대한 상상력을 가다듬고 거대 담론들을 다시 정비할 필요가 있다. 세계적 격변이 진행되는 시기에 일국·양국·민족 차원의 담론은 유효성이 줄었다. 한편 ‘분단체제론’의 인식론적 유용성은 더 강화되는 것 같다.
분단체제론의 문제의식은 세계체제-남북한체제-국가체제를 연결해 통합적으로 보자는 것이다. 필자는 이를 ‘한반도체제’라고도 이름 붙일 수 있다고 본다. 미·중관계의 악화, 남북관계의 악화, 한국 및 북한의 국내적 퇴행이 겹치면서 한반도 분단체제는 다시 강화되고 있다. 분단체제가 강화되면 한국은 더 위험해지고 미래는 더 불안해진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자유주의 정치질서를 표방하고 소통의 정치를 복원할 것을 공약한 바 있다. 그러나 정권 출범 초기에 약간 소통을 시도하다가 정치적·정책적 무능이 노출되었다. 이후 극우 지지층을 결집하고 반대세력을 적대화하는 포퓰리즘 경향을 내보이고 있다. 이러한 윤석열 정부의 퇴행은 ‘분단체제의 재공고화’로 규정될 수 있다.
이남주 교수에 의하면, 윤석열 정부는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결이라는 신냉전적 인식에 기반해 분단체제를 재공고화하는 퇴행적 기획을 시도한다. 여기에는 첫째, 보수의 비전 부재, 둘째, 집권 초의 정치적 위기, 셋째, 미국의 요구 등 요인이 작용했다고 한다. 그는 분단체제의 재공고화가 국내 기득권 세력의 안정화를 위한 기획의 결과이고, 북한의 전략 변화도 분단체제의 재공고화에 호응했다고 본다(‘창작과비평’ 201호). 필자는 분단세력의 기획 행위보다는 2010년대 이래의 체제적·구조적 요인에 더 주목하고 싶다. 한반도 분단체제는 세계체제에 포함된 하위 시스템이다. 그래서 분단체제의 국면 변화에 미치는 세계체제 요인이 중요하다. 세계체제의 변동과 분단체제의 강도가 서로 연동돼 있다.
한국은 1987년 민주화체제 아래에서 세계 10위권에 접근하는 경제규모로 성장했다. 이 시기에 중국·러시아가 세계자본주의에 합류했고, 글로벌 시장이 확장했다. 노태우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분단체제 유동화 국면에 비교적 탄력적으로 대응했다. 국내적으로는 진보·보수의 교착 속에서 경제성장을 지속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글로벌화가 승리하는 한편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는 점차 약화됐다. 미국의 성장률·자본수익률이 중국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됐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미국과 중국은 성장률 침체와 불평등 확대에 직면했다. 중국은 과잉 생산능력을 해소하기 위해 자본을 수출하고 세력권을 확대하려는 의지를 드러냈다. 미국도 ‘아시아로의 회귀’를 내세우며 중국을 견제하려 했다.
미국과 중국의 내부 모순이 확대되고 미·중 경쟁이 격화되는 한편, 분단체제를 강화하는 계기들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2008년 금강산 관광이 중단됐고, 2009년 북한의 2차 핵실험이 실시됐다. 2010년에는 천안함 사태가 발생했으며 남북 교류가 중단됐다. 2013~2017년 사이에 네 차례의 북핵 실험이 이어졌다. 2016년 6월에는 개성공단 폐쇄, 7월에는 주한미군 사드 배치가 결정됐다. 중국은 미군 무기 배치에 토지를 제공한 한국에 대해 경제제재를 가했다.
한국경제 지표는 2010년대 중반 이후 저성장, 불평등, 저출생·고령화 추세가 뚜렷해졌다. 이러한 경제적 악화는 정치적 적대의 격화, 사회적 붕괴 현상과 동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총체적 악화가 분단체제 재강화와 연관이 있다고 본다. 문재인 정부 시기에 시도된 북·미 협상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여기에는 세계체제와 남북한 내부의 분단체제의 압력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분단체제는 더욱 굳어졌다. 시장은 좁아지고 정치·경제·사회적 붕괴의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상황을 개선할 방도는 없을까. 분단·분열과 파괴를 막는 활로는, 세계-남북한-국내 각 차원에서 중도·중간의 영역을 꾸준히 마련하는 길뿐이다. 쉽지 않겠지만, 그것이 유일한 희망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