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후에게 이종범은 훈장이자 낙인이었다

2024.01.17 19:54 입력 2024.01.17 19:55 수정

나이 든 야구팬들에게 이정후는 이종범의 아들이지만, 젊은 야구팬들에게는 이종범이 이정후의 아버지다.

이정후는 지난해 말 메이저리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6년 1억1300만달러에 계약했다. 역대 한국 선수의 메이저리그 포스팅 최고 금액일 뿐만 아니라 이번 스토브리그 야수 전체를 통틀어서 총액 기준 최고 금액이다. 평균 연봉 1883만3333달러는 LA 다저스와 1년 2350만달러에 계약한 테오스카 에르난데스에 이어 2위다. 물론 투수와 타자를 모두 하는 오타니 쇼헤이(10년 7억달러)는 제외다.

KBO리그 최고의 타자임을 증명했다. 2022년에는 타격왕, 득점왕, 타점왕 등에 오르며 시즌 MVP에 뽑혔다. 올해부터는 메이저리그에서 뛴다.

원래 야구 선수를 못할 뻔했다. 아버지 이종범은 아들 이정후를 야구에서 떼놓으려 애썼다. 운동에 재능 넘치는 아들을 어릴 때부터 다른 종목으로 내몰았다. 골프, 축구, 수영, 쇼트트랙을 시켰다. 야구만 빼고. ‘이종범의 아들’로 야구를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기 때문이다.

피는 못 속이고, 운명은 악착같다.

고종사촌형 윤형준(NC)이 야구를 시작하자 이정후의 몸이 달았다. 초등학교 3학년을 앞두고 어머니가 이정후의 손을 잡고 야구부 테스트를 보러갔다. 반대하던 아버지가 스프링캠프에 가 있을 때였다. 캠프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대신 딱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그럼, 왼손으로 쳐라.” 오른손잡이 이정후가 우투좌타가 된 건 이 때문이었다. 야구는 왼손타자에게 조금 더 유리한 종목이고, 가시밭길에서 조금이라도 확률을 높이려는 아버지의 바람이 담겼다. 이정후는 “다시 태어나면 우타자가 되고 싶다”고 웃으면서도 “어쩌면 왼손타자라서 여기까지 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린 이정후에게 아버지 이종범은 자랑스러운 ‘훈장’이었지만 그 시간이 길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야구 선수가 된 이후 ‘이종범’이라는 이름은 ‘낙인’에 가까워졌다. 엄격한 어머니는 “우리 아빠가 이종범이야”라는 자랑을 금지시켰다. 그래도 소문은 무섭다. 중학교 시절부터 이정후가 3번이나 4번타자로 나서면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 얼마나 잘하나 보자’라는 시선이 늘 이정후를 따라다녔다. 이정후는 “그제서야 아빠가 왜 야구를 시키지 않으려 했는지 알게 됐다. 너무 힘들었는데, 그래도 울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고등학생 이정후에게 아버지는 넘어야 할 산이 됐다.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는 시선과 싸우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이정후는 “그 시선들에 지고 싶지 않았다. 속상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내가 더 잘해서 증명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종범 아들의 엄마라는, 더욱 매서운 시선을 견뎌내야 했던 어머니 정연희씨는 이정후를 더욱 분발시키는 촉매제였다.

아버지처럼 유격수로 히어로즈에 입단했지만 곧 외야수가 됐고, 리그 최고의 타자로 성장했다. 프로야구 사상 전무후무할 ‘1994년 이종범’을 넘어서는 시즌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커리어 전체로는 더 뛰어난 타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아버지가 가보지 못한 메이저리그에 역대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진출했다. 더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이정후 입단 소식을 전하며 ‘바람의 손자(grandson of wind)’라는 별명을 소개했다. 이종범의 별명이 ‘바람의 아들’이라는 설명과 함께였다. 이정후는 과거 인터뷰 때 “지금은 괜찮은데, 서른 넘어서도 ‘손자’로 불리면 이상할 것 같다”며 웃었다. 메이저리그 팬들도 이종범이 이정후의 아버지라고 알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

야구에 빗댄 유명한 격언처럼 이정후 역시 3루타를 때린 게 아니라 3루에서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3루에 서 있는 동안 훈장과 낙인을 오간 수많은 시선과 싸운 끝에 실력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미국의 스포츠칼럼니스트 릭 라일리는 스포츠의 매력 중 하나로 “스포츠는 뒷문이 없다. 엄격한 실력의 세계다. 당신이 트럼프 집안 사람이라면 건물을 지을 수 있겠지만 스포츠에서는 누구도 유전자만으로 경기에 뛸 수 없다”고 적었다.

누군가의 ‘후계자’라는 것이 곧 성공을 뜻하지는 않는다. 언제나 훈장은 낙인이 될 수 있고, 이를 뛰어넘는 노력과 실력에 대한 증명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스포츠가 주는 교훈이고 우리 모두의 삶이 나아지기 위한 필수 덕목이다. 정치도, 경제도 마찬가지다.

이용균 뉴콘텐츠팀장

이용균 뉴콘텐츠팀장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