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늦기 전에

2024.02.15 20:29 입력 2024.02.15 20:31 수정

한국 축구가 아시안컵 준결승전에서 요르단에 무기력하게 패배해 큰 충격과 실망을 줬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64년 만의 아시안컵 우승이라는 기대가 근거 없는 희망사항이었음을 쉽게 알게 된다.

클린스만 감독 부임 이후 수많은 우려와 비판이 있었고 감독 교체의 여론도 높았지만, 작년 9월에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친선경기에서 운 좋게 처음으로 이겼고, 아시안컵 예선 및 16강전과 8강전에서도 아슬아슬하게 운이 따랐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한국 축구대표팀의 민낯은 준결승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몇 차례는 운으로 가릴 수 있었지만, 결국에는 근본적인 전술과 전략의 부재 그리고 그에 따른 조직력 와해의 후과를 피할 수 없었다. 감독 교체와 축구협회 회장 및 집행부의 총사퇴를 통해, 이번 일이 한국 축구가 전화위복 되는 계기가 되길 팬으로서 바랄 뿐이다.

그런데 한국 축구보다 한국 경제가 더 문제다. 한국 경제의 위기 징후와 이에 대한 경고는 지난 10년여간 지속돼 왔다. 축구보다 경제는 훨씬 더 복잡하고 인과관계 사이에 시차도 크다. 이해관계 역시 훨씬 더 복잡하고, 개혁에 대한 기득권의 저항도 비할 바 없이 강력하다. 따라서 잘못된 진단과 처방으로 기득권을 유지하거나 기득권에 영합하려는 시도가 만연하고, 이는 국민의 눈과 귀를 어지럽혀 개혁을 막기 십상이다. 나아가 위기가 현재화되는 시점이 전화위복 기회가 아닌,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최근에 “삼성전자에 큰일이 난 게 분명하다”는 말이 나돈다. DRAM 부문에서 삼성전자의 압도적 경쟁력이 확 떨어졌다는 진단이다. 생성형 AI 서비스에 필요한 HBM(고대역폭 메모리) 시장에서 SK하이닉스에 밀렸고, DDR5 등 일반 DRAM 사업에서도 경쟁사업자들에게 뒤지고 있다. 또한 삼성전자가 야심차게 도전하고 있는 시스템 반도체 사업에서도 뒷걸음치고 있다. 스마트폰 부문에서 저가 제품시장을 중국업체들이 잠식한 것은 이미 10년 전 일이고, 고가 제품시장에서도 지속적으로 애플과의 경쟁에서 도태되고 있는 이른바 ‘샌드위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위기의 원인과 대책은 무엇일까? 필자는 2016년 책 <삼성전자가 몰락해도 한국이 사는 길>을 발간한 바 있다. 노키아 몰락의 원인을 분석하고 삼성전자와 한국 경제에 대한 함의를 찾는 내용이었다. 노키아의 몰락은 혁신적 산업의 내재적 특성인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불확실한 기술발전에 대비하기 위해 노키아는 2009년 기준으로 매출액의 14.4%를 연구·개발에 투자했고, 수많은 신생기업들을 인수했다. 그 결과, 스마트폰의 효시인 커뮤니케이터(Communicator)를 출시했고, 스마트폰 시대에 콘텐츠의 중요성도 정확히 꿰뚫어 최초의 앱스토어인 오비(Ovi)를 구축하기도 했다. 그러나 회사 내부 의사결정 과정에서 기존의 저가 휴대폰에 기초한 성공의 경험과 이들 사업부의 의견이 우선되었고, 새로운 기술의 채택보다 기존 기술의 향상이라는 전략적 결정을 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슘페터의 예측대로, 파괴적인 혁신은 도전 기업이었던 애플의 몫이 되었다.

삼성전자가 지금 맞닥뜨리는 문제와 이에 대한 대응 역시 노키아의 전철을 따르고 있는 듯하다. 삼성전자는 과거 성공 공식이었던 수직계열화 전략을 시스템 반도체 사업에서도 고수함으로써 파운더리 분야에서 TSMC를 쫓아갈 기회를 놓치고 있다. DRAM 공정혁신이 슘페터적 혁신이라면 새로운 방식의 채택에 뒤처지고 있고, 새로운 혁신이 없는 경우라면 선도기업으로서 이점을 상실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금껏 메모리 반도체 부문이 나쁠 때는 스마트폰 부문이 좋았고, 스마트폰 부문이 나쁠 때는 반도체 부문이 좋은 운을 누려왔다. 현재 삼성전자가 정말 위기로 보이는 것은 이 두 부문이 동시에 나빠지고 있어서다.

그런데도 삼성전자는 위기에 대한 진단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이런 위기마저도 총수 일인의 일신상 안위를 위해서 이용하는 것 같다. 또 이에 동조하는 언론도 적지 않은데, 마치 재벌 총수 ‘개인기’로 회사가 좋아진다는 낯 뜨거운 기사들로 보수 경제지들이 도배를 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몰락이 슘페터적 혁신 경쟁의 결과로 불가피하더라도, 핀란드경제처럼 한국경제는 회복력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과 시장의 유연성을 담보할 수 있는 재벌개혁이 필수적이다. 또 시장이 제대로 작동할 것이라는 신호를 주기 위해서라도, 분식회계와 주가 조작사건은 엄벌에 처한다는 판례를 확립해야 한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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