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 상병 사건과 오키나와 전투

2024.05.28 20:41 입력 2024.05.28 20:43 수정

[정희진의 낯선 사이]채 상병 사건과 오키나와 전투

최근 출간된 한겨레 고경태 기자의 저서 <본 헌터(Bone Hunter) - 어느 인류학자의 한국전쟁 유골 추적기>를 읽고 그 여진에서 자유롭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은이와 책의 주인공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의 노동과 지적 호기심, 인간에 대한 예의야말로 ‘진정한’ 역사의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전쟁은 전 세계 26개국이 참전한 ‘3차’ 세계대전이자 100만명의 민간인 사상자를 낳은 내전이었다. 그렇다면 그 유해들은 어디에 있을까. 미국은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자국군의 시신을 즉시 수습해 본국으로 보냈다. 반면 지난 70여년간 한국 정부는 발굴 개념조차 없거나 색깔론을 운운해왔다.

우리는 전쟁 희생자의 유해 위에 세워진 건물, 도로, 각종 인프라에서 살고 있다. 충남 아산 인근 지역을 주로 다룬 책의 첫 발굴 에피소드 제목은 “여긴 땅 파면 다 시체야”다.

‘참전 용사(勇士)’라는 단어는 군인만 전쟁을 치르는 듯한 인상을 준다. 많은 군속(軍屬), 각종 보급 업자들, 민간인도 전쟁의 참여자다. 또한 전쟁과 평화의 시간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당대 채 상병 사건이 그것이다. 이는 현 정부가 평시에 군인을 어떻게 대우하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문화인류학자 엄기호는 채 상병 사건을 계기로 국가주의 사회에서 구조와 탈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세월호가 국민의 죽음을 방치한 사건이라면, 이태원 참사는 죽음에서 탈출하려는 국민을 막은 사건이며, 채 상병 사건은 국민을 구조하려는 군인을 역사에서 삭제하려는 경우라는 것이다.

국가는 본디 합법적 폭력 기구다. 폭력만이 국가의 본질은 아니지만, 국가는 언제나 ‘적절한 국민’을 선택한다. 국민에 대한 보호와 처벌에는 철저한 포함과 배제의 기준이 있다. 수해 실종자를 구하려 했던 해병대 상병이 국가 유공자가 되지 않고, 온갖 정치적 논란에 휩싸인 지금 상황은 매우 증후적이다. 상식과 비상식은 진실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자의 위치성 이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 사건은 너무나 이상하다.

오키나와 전투서 강요된 집단자결

‘동양의 하와이’로 불리는 오키나와는 2차 세계대전 중 가장 큰 규모의 전쟁이 벌어진 곳이다. 침략국 일본은 한 번도 본토에서 전쟁을 치르지 않았고 ‘내부 식민지’인 오키나와를 전쟁터로 삼았지만, 결국 본토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면서 패했다.

오키나와는 원래 일본의 땅이 아니었다. 14세기부터 오키나와에는 군대가 없는 류큐(琉球) 왕국이 번성했는데, 1609년 지금의 가고시마에 있던 사쓰마국(国)이 처음 오키나와를 강제 병합했다. 1879년 일본 정부는 무력으로 류큐 왕국을 점령, 오이나와현(縣)으로 일본에 강제 편입시켰다.

오키나와는 일본 전체 면적의 0.6%에 불과하지만 주일 미군의 75%가 주둔하고 있으며 오키나와 본도(本島)의 20%를 미군 기지가 차지하고 있다. 오키나와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한 1945년부터 27년간 미국의 식민지였다가 1972년 일본으로 - 미국과 일본을 주체로 보면 - ‘반환’되었다.

27년간 오키나와를 지배한 미국은 오키나와의 지리적 위치에 주목했다. 오키나와에서 2000㎞ 이내에 동아시아의 주요 도시 타이베이, 베이징, 평양, 서울, 마닐라 등이 모두 들어오기 때문에 오키나와는 아시아의 군사 거점이 되기에 최적이었다.

비극의 절정은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4월1일부터 6월23일까지 83일 동안 벌어진 소위 ‘철(鐵)의 폭풍, 아이언 스톰(iron storm)’ 전투다. 미국은 엄청난 폭격을 퍼부었고, 일본 정부는 애초부터 자국 영토인 오키나와를 지킬 생각이 없었다. 오키나와는 일본의 ‘총알받이’ ‘버려진 돌’이었다.

당시 일본의 전략은 오키나와를 볼모로 미군이 전력을 소모하도록 하는 지구전이었다.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해 압도적인 해상력과 제공권을 가진 미국의 진을 빼는 것이었다. 6월23일 총지휘관이었던 우시지마(牛島滿) 사령관의 자결로 전투가 끝나기까지 18만 미군과 7만 일본 수비대가 격전을 벌였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사망한 미국 병사는 1만명인 반면 10만명 넘는 오키나와 현지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특히 일본이 오키나와 주민에게 강요한 집단 자살(forced mass/collective suicide)은 유례가 없는 세계 전쟁사의 참극이었다. 일본 정부의 군령에 의해 9만4000명의 오키나와인들이 ‘스스로 사망한’ 것이다.

당시 오키나와 방위 부대인 일본제국 제32군의 사명은 오키나와 주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일이 아니었다. 수세에 몰린 일본군은 오키나와인들이 “미국의 스파이가 될 것”을 우려, 심리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미군이 상륙하면, 남자들은 고문받아 죽고 여성은 강간당해 죽을 것”이라며 극도의 공포감을 조성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미군의 손에 치욕적인 죽음을 맞이할 바에야 자결이 낫다고 명령했다.

국민의 자구 활동도 막는 국가

오키나와인들은 일본군에게서 받은 수류탄을 터뜨려 죽거나 극약을 먹고 죽었다. 수류탄이 모자랄 지경이어서, 가족과 이웃은 서로를 칼로 찌르거나 목을 졸라 죽는 것을 도왔다.

이후 많은 이들이 집단 자결의 이유를 연구했다. 배경은 다양했다. 포로로 잡히는 것은 치욕이며 천황의 이름으로 용감하게 죽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앞에 쓴 대로 미군에게 잡히면 남자는 참살당하고 여자는 강간당한 후에 살해당한다고 교육받았기에, 항복해서 포로가 되려는 자는 죽일 것이라는 일본군의 위협(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이유로 죽었다), 군관민 공생공사의 일체화라는 개념이 오키나와 주민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 군이 천황을 위해 죽으면 자신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 일본군 병사들이 주민들의 손에 수류탄을 쥐여주면서 그것을 이용하여 자살하도록 명령한 것, 자살하라는 군령이 하달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경우, 즉 누가 언제 말했는지 불명확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군령이 내려지면 죽어야 한다고 믿었다.

포로와 수용소에 수용된 민간인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했던 미국의 분석에 따르면, 두 번째 요인, 즉 미군에게 붙잡힐 경우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당한다는 공포가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본다. 이는 만주전에서 싸웠던 구일본군 병사들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많은 일본 병사들이 오키나와 전투 이전에 참전했던 중국 전선에서 “일본군에 의한 주민학살, 강간, 약탈이 당연시되었기 때문에” 미군도 같은 방식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보았다.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기에 타인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진실’은 집단 자결 현장에서 생존한 이들에 의해 밝혀졌다. 자결에 실패한 생존자들은 미군을 마주했지만, 일본군이 주입했던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전후 일본 사회에서는 철의 폭풍 당시 9만4000명의 강제 집단 자결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오키나와인의 천황에 대한 충성심이라고 했고, 어떤 이들은 미군에 대한 저항이라고 분석했지만 여성주의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여성주의자들은 집단 자결을 한 가족과 하지 않은 가족의 차이가 무엇일까를 질문했다. 집단 자결을 하지 않은 가족들은 대개 집안에 아버지나 오빠 등 남성 구성원이 없었다. ‘보호자인 아버지’가 있는 집안은 자결했다. 남성들은 국가의 협박에 의해서든, 미군의 ‘끔찍한 학살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든’ 대개 가족을 죽이고 자신도 자결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의 강요된 집단 자결은 국가 내부의 차이, 국민 범주의 임의성에 대한 명확한 사례지만, 여전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인간 본성’에 의문을 남긴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생각은 내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를 직면하지 못한 ‘우리나라’에 대한 방어 심리였다.

지난 21일 윤석열 대통령은 ‘해병대 채 상병 순직 수사 외압 의혹 특검법안’(채 상병 특검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수십년 전 일부 일본 국민(오키나와인)에게 강요된 집단 자결에서 작동한 국가주의 논리와 한국 정부가 재난에 대처하는 태도는 무엇이 다른가?

국가가 국민을, 남성이 가족을 보호한다는 이데올로기는 예전 같지 않다. 그만큼 기대가 없다해도, 현 정부의 채 상병 사건에 대한 대응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제는 각자도생조차 허용하지 않고 국민이 국민을 살리는 행위도 막겠다는 것인가.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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