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다. 저출생과 저출산도 그렇다. 이 경우 더 주목할 것은 말을 하는 이들의 진단이 달라 향하려는 방향 또한 다르다는 점이다. 오래 지속되고 있는 ‘출산파업’으로 산부인과부터 초중고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여파가 차례차례 현실화되니 정부도 이런저런 대책을 부랴부랴 세우려 하는 듯 보인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저출생 대책이라고 말하고 또 한편에서는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의 경우처럼 여전히 저출산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만큼 내부에서도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 혼선과 혼란이 있는 것 같다.
저출생은 말 그대로 출생아의 수를 문제로 보는 말이다. 언뜻 보면 태어나는 아이가 중심인 좋은 말 같다. 그러나 출생이 출산을 통해 일어난다는 사실을 가린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아이가 하늘에서 내려오길 바라거나 공장에서 아이를 만들려는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저출산은 말 그대로 출산을 적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심에 두는 말이다. 이 말은 출산을 왜 안 하는지를 질문하고 살피게 하고 또한 임신하고 출산하고 양육하고 돌보는 사람을 보살피게 한다. 그리고 그동안 이를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인지하게 해준다. 제대로 된 진단은 제대로 된 정책을 만드는 데 필수다.
저출산을 살필 때도 문제될 관점이 있다. 사람을 ‘숫자’로 보는 점이다. 출생률이든 출산율이든 사람을 숫자로 보는 태도에는 사람을 고유한 삶의 주체가 아니라 ‘인구’라는 통계학적 추상체로 보는 시각이 깔려 있다. 이런 관점에는 사회 시스템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위해 사람이 필요하다는 위험천만한 전체주의적 인간관이 스며 있다.
어떻게 보면 현재의 경제 시스템 자체가 사람을 각기 고유한 삶을 살아가는 인격체로서 바라보기 어렵게 한다. 사람을 인격체가 아니라 노동력 상품으로 취급하니 말이다. 정부도 이 시스템의 일부다. 사람의 고유한 생활세계를 살피려는 태도는 보기 어렵고 ‘인구’라는 숫자로 보기 급급하다. 적정 인구가 기업이 필요한 노동력을 군말 없이 저렴하게 제공해 주었으면 좋겠고 기업이 파는 상품을 재깍재깍 구매해 소비해 주면 좋겠고 그렇게 하기만 하면 사회가 문제없이 돌아갈 것같이 보일지 모른다. 이런 정부는 인구감소, 인구절벽이라는 말을 쓰기 좋아한다.
소진, 기진맥진, 한도초과와 같은 말들은 이 시대의 상징어들이 되었다. 사람들에게 더 이상 쥐어짜일 에너지가 없다는 말이다. 아이를 낳을 부모가 사는 세상이 이러는 한 저출산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46억년 지구 역사에서 모든 생명체가 개체 보존이 되지 않을 때는 종 보존을 멈춘다는 것이 정설이다. 인간도 다르지 않다. 아이가 좋은 삶을 살려면 아이를 낳을 어른들이 좋은 삶을 살고 있어야 한다.
그나마 있던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씩으로 걸고 출범한 정부의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에 여가부 장관직이 공석이다. 여가부 폐지를 앞장서 주장한 정치인들은 이제 국회의원이 되어 각각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와 기획재정위원회 활동을 시작했다. 우리 사회의 미래가 나아지길 기대하기는 더 어려워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