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 선생이 떠났다. 독재시대를 건너온 자들은 하던 일을 멈추었다. 누군가에게 부음을 전하려 했건만 받을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깨동무를 하고 구호를 외쳤던 무명의 청춘들은 어디에서 늙어갈까. 언제 어디에서 자신의 젊음을 벗었을까. 먼 하늘을 보다가 ‘아침이슬’ 맺혀있는 젊은 날의 어디쯤에 내렸다.
1970년대는 살기(殺氣)가, 1980년대는 광기(狂氣)가 사회 구석구석에 스며있었다. 20세기에 청춘을 묻었건만 기억하면 아직도 최루탄 냄새가 났다. 여기저기서 김민기의 죽음을 ‘아침이슬’로 씻기었다. 잿빛 하늘 아래 희뿌연 거리에서 ‘아침이슬’을 부른 자들은 이제 흰머리에 등이 굽었다. 정연했던 논리에도 검버섯이 피었다. 용케 살아있구나. 많이 흘러왔구나. 그런데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를 가려다가 멈춰서 있는가. 왜 이리 남루한가.
김민기는 전설이었다. 그에 대한 소문에는 광휘가 묻어있었다. 맨손으로 민주화를 외쳤던 시위대에 김민기의 노래는 연대의 무기였다. 하지만 너무도 서정적이었다. 독재를 타도하기에는 노랫말이 고왔다. 그럴수록 곡을 만든 김민기는 강철 같은 투사여야 했다. 모습을 감춰버렸기에 오히려 저항의 상징이 되었고, 그의 노래에 물든 젊은 가슴에 신비로운 전사로 각인되었다.
이윽고 김민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데 그는 물샐 틈 없는 투사가 아니었다. 절세의 저항가수라는 금관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제 노래는 젊은 날의 일기 같은 것이었어요.” 자신의 노래가 과대 포장되어 유통되었다며 송구하다고 했다. 그렇게 고백하고 김민기는 작은 마을로 내려왔다.
그곳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화가인 김민기가 그리고 싶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세찬 바람이 불어오면 벌판으로 달려가 바람을 안아보았다. 어두운 비 내려오면 두 눈에 빗물을 담았다. 그렇게 다시 소년이 되었다. 일생 소년으로 살았던 권정생 선생도, 선생이 섬겼던 예수님도 사람을 찾아 헤매지 않았던가.
김민기의 노래를 부를 때는 기교를 부리거나 포효하면 안 된다. 과한 애드리브(즉흥연주)도 삼가야 한다. 노랫말이 가난하고 음들이 격하게 출렁거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김민기의 노래는 잘 부르기 어렵고 못 불러도 티가 나지 않는다. 슬프지만 슬픔을 빠져나와 담백하다. ‘서울로 가는 길’처럼 시대의 아픔을 따뜻한 가슴으로 품었다가 풀어낸 모두의 이야기들이다. 늙으신 부모님을 두고 고향을 등지는 일이 얼마나 막막하고 두려웠는가. 당시 젊은이들은 그렇게 눈물을 뿌리며 고향을 떠나왔다. 그 아픔을 천연덕스럽게 옮겨놓고 있다. “앞서가는 누렁아 왜 따라나서는 거냐. 돌아가 우리 부모 보살펴드리렴.” 이렇듯 가슴 저미는 구체적인 슬픔이 들어있지만 노래는 단조가 아니다. 김민기의 노래에서는 절규와 분노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김민기는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세상을 바꾸려는 거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세상 속에 들어가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작은 오두막 하나 짓고 작은 일을 하고 싶어 했다. 투쟁 속에도 절망, 희망, 휴식, 연민이 들어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세상을 편 가르는 어떤 행위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그가 쑥스러워할 것을 알면서도 남은 자들이 그를 찾는다. 물론 어디든 조용하고 경건하다. 하지만 유족들도 그를 닮았나보다. 고인의 뜻에 따라 어떤 추모공연이나 추모사업도 원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추모하지 않음이 진정한 추모인 사람, 생전에 명예와 미움을 태워버린 사람, 김민기. 작가 서해성은 그의 넋이 너무 아름다워서 영전에 꽃을 올릴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노래가 될 수 없는 문자로 이렇듯 그를 기리는 일이 허허롭다.
그는 하늘에서만 빛나지 않을 것이다. 가난한 마을에 불이 켜지면 별들의 노랫소리를 담아 내려올 것이다. 모든 잘난 것들이 사라진 마을에는 또 다른 김민기가 살고 있을 것이다. 그곳에 내려 두리번거릴 것이다. 주막을 발견하면 어떤 속기(俗氣)도 묻어있지 않은 미소를 지을 것이다.
우리 삶도 떠내려가고 있다. 노을 뒤편의 어둠이 보인다. 노래 한 곡 받쳐들고 우리도 머지않아 어딘가에 내려야 한다. 무엇을 받들고 무엇을 버려야 김민기 마을에 들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