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사가이자 연극 대본과 영화 시나리오를 쓴 작가, 배우로도 활동했던 왕평(1908~1940, 본명 이응호)이 재조명되고 있다. 시인이자 노래연구가인 이동순은 최근 발간된 <나는 왕평이다>(일송북)에서 짧고 굵게 살다간 그의 삶을 추적하고 있다. ‘황성옛터’의 작사가로 유명한 왕평은 서른두 살의 나이에 연극 <남매> 공연 도중에 뇌출혈로 쓰러져 세상을 떴다. 그는 100편이 넘는 노래를 작사했고,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직접 출연까지 한 ‘재주꾼’이었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왔노라….”
배재중학교를 졸업한 왕평은 악극단인 조선연극사 무대감독으로 취직했다. 1927년 개성 공연을 갔다가 연주단장인 전수린과 폐허가 된 고려 왕궁터인 만월대를 찾았다. 그곳에서 왕평이 전수린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노랫말을 붙였다.
왕평은 이 노래를 단원이었던 이애리수(사진)에게 부르게 했다. 처음엔 연극 막간에 불렀는데 앙코르가 쏟아져 9번이나 불렀다고 한다. 결국 그녀는 단성사에서 이 노래만 전문적으로 부르는 가수가 됐다. 이애리수가 공연할 때면 워낙 많은 사람이 모여 말을 탄 일본 순사가 출동할 정도였다. ‘조선의 세레나데’라는 별명을 얻은 이애리수는 1932년 정식 앨범을 내고 데뷔했다. 그러나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서 자살 소동 끝에 은퇴했다.
나라 잃은 식민지 국민들의 울분을 달래던 이 노래는 결국 금지곡이 됐다. 그러나 그 인기는 막을 수가 없었다. ‘황성옛터’는 남인수와 배호, 하춘화, 이미자, 조용필, 나훈아에 이르기까지 많은 후배들이 다시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