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나비는 종종 꿈을 꿉니다. 혼자 짖기도 하고, 허공에 대고 허우적허우적 달리기도 합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개와 고양이, 조류 혹은 일부 어류도 꿈을 꾼다고 합니다. 그들의 꿈은 행복한 색깔일까요? 아직도 우리는 돼지꿈을 꾸면 복권을 삽니다만, 이미 120년 전 프로이트는 저서 <꿈의 해석>을 통해 미신에 기댄 해몽을 배척하고, 꿈을 과학적으로 탐구했습니다. 학창 시절, 너도나도 보길래, 저도 한번 읽어보았지만, 문장과 단어가 어려워 이해는 고사하고 읽어내기도 힘들었습니다. 부끄러운 소양이나, 꿈의 재료, 꿈의 목적을 소원 혹은 욕구의 성취로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우리 어머니 꿈해몽도 영 틀린 말은 아니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편 이루고자 하는 꿈도 ‘꿈’이라고 부르지요? 아이들의 장래희망, 젊은이의 포부를 “꿈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소원의 성취라는 맥락에서 인류는 프로이트 이전부터 꿈의 본질을 어렴풋이 이해하고, 언어에 녹여냈기에 꿈은 두 가지 뜻을 가진 단어가 되었나 상상도 했습니다.
2024년 파리 올림픽, 축제가 한창입니다. 제가 처음 기억하는 올림픽은 하형주 선수가 유도 금메달리스트가 되어 ‘어무이, 인자 고생 끝났심더’ 하며 웃던 1984년 LA 올림픽입니다. 그 시절 올림픽은 국위선양을 목표로 싸우는 전쟁터였고, 선수단은 ‘태극전사’였습니다. 승리한 전사는 영웅이 되었고, 패배한 선수들에게 돌아갈 위로와 응원은 없었습니다. 지도자나 소위 전문가들은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여, 선수들에게 ‘악바리 근성’을 강요했습니다. 대한민국 응원가 가사조차 ‘이기자. 이기자. 이겨야 한다’였습니다. 그 시절 올림픽은 축제도, 꿈의 무대도 아니었습니다. 금메달을 따서 부모·형제의 고생을 끝내리라, 하나의 꿈만 좇아 뛰기에도 숨이 차던 시절이었습니다. 선수들의 땀은 위대했지만, 메달을 딴 선수에게만 갈채를 보낸 우리는 미성숙했습니다.
그에 비해 이번 파리 올림픽에 참가한 우리 선수단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입니다. 한 국가를 대표하기까지, 한 종목을 대표하기까지, 그 노력이나 수고로움은 예전과 다르지 않을 것이나, 올림픽을 맘껏 즐기는 표정들입니다. 탁구의 신유빈 선수는 메달을 놓쳤지만, “이것이 현재 나의 최선이다”라며 밝게 웃었고, 승자에게 아낌없는 축하를 건넸습니다. 사격의 김예지 선수는 단 한 발의 실수로 결선 진출에 실패했지만, “재미있고 기억에 남는 시간이었다”며 “실수조차 나에겐 소중한 경험”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멋진 선수들이 어디 있을까요? 그들의 석패에도 따뜻한 응원을 건네는 우리는 또 어떤가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조금 더 성숙해진 것이고, 조금 더 살기 좋아진 덕분입니다.
꿈을 이루고서 그제야 행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언제쯤 행복해질까요? 1등이 되어야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면, 우리 중 몇명이나 행복해질까요? 그런 시절이 아니라 다행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꿈은 있는 그대로 응원받아 마땅합니다. 아쉬운 실패에도 응원이 있는 사회라면 우리가 선 곳이 곧 꿈의 무대이고, 하루하루가 신명나는 축제가 될 것입니다. 나비가 쉴 틈 없이 쩝쩝거리는 것을 보면, 꿈속에서 근사한 걸 먹나봅니다. 행복한 꿈이겠네요. 나비처럼 우리 모두가 자면서건, 깨어서건, 행복한 꿈만 가득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