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시간

2024.08.11 21:13 입력 2024.08.11 21:17 수정

국민권익위원회를 검색창에 치면 ‘「반부패 총괄기관」 국민권익위원회’라고 뜬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정책 정보를 클릭해도 반부패·청렴 정책이 최우선 정책으로 소개된다. 이처럼 반부패와 청렴이 국민의 권익과 직결되는 정치적 덕목이라는 것을 권익위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권익위가 이상하다.

지난 8일 청탁금지법 담당부서의 책임자인 김모 국장이 숨진 채 발견됐다. 고인은 권익위에서 부패 관련 정책을 총괄하는 부패방지국의 국장 직무 대리를 수행했다. 특히 김건희 여사의 명품가방 수수의혹 사건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의 응급헬기 이용사건 등의 조사를 지휘했다. 업무 과중과 스트레스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으나, 심상치 않은 원인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생전에 김 국장은 김건희 여사 명품가방 사건처리 문제로 압박감을 느꼈다는 증언이 잇따른다. 또한 이지문 한국청렴운동본부 이사장에 따르면, 김건희 여사 사건과 관련해 권익위의 정치적 독립성에 문제를 제기했다고 한다. 청렴한 공직자가 부패한 권력과 복지부동하고 무능한 공무원들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린 것이다.

사건의 원인은 지난 6월 권익위가 김건희 여사의 명품가방 수수행위에 대한 청탁금지법 위반 여부 조사에서 ‘위반 사항 없음’으로 종결 처리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권익위 전원위원회는 ‘청탁금지법상 공직자 배우자에 대한 제재 규정이 없기 때문에 종결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최정묵 비상임위원도 종결 처리에 반발해 ‘법리적으로 다툼의 여지가 있었고, 중요한 비리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혐의 없음으로 종결됐다’고 비판하며 권익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느껴 사퇴했다.

정치적 독립성은 정치적 이념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권력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이다. 부패는 ‘정치, 사상, 의식 따위가 타락’한 것을 말한다. 권익위가 직접 금품을 수수한 것은 아니지만, 그 위원들은 국민의 권익이라는 정치도 사상도 의식도 팽개치고 권력 앞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부패 총괄기관이 부패한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은 ‘공직자가 권력에 굴복하면 정의가 죽는다’라는 윤 대통령의 과거 발언을 들어 직격하며, ‘양심적 의견을 낸 공직자를 죽음으로 내몬 윗선부터 밝혀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에 대해 국민의힘은 ‘무조건적인 정치 공세는 협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다’고 응수했다. 하지만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유승민 전 의원은 “권익위의 종결 처리가 부패방지국장을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이라면, 이 나라의 부패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라며, ‘권익위의 모든 결정 과정을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철수 의원은 필사적 정쟁이 안타까운 죽음을 초래한 것이라고 여야를 싸잡아 비판하기도 했다.

양극화와 상호 비방의 정치가 원인이라는 지적도 틀리지 않다. 하지만 정권의 후안무치와 무능이 근본 원인이라는 지적이 더 진실에 가깝다. 안타까운 한 죽음을 정치 공세로 이용하는 것은 분명 문제다. 하지만 또 다른 정치 공세와 은폐 축소를 위해 ‘협치(協治)’를 운운하는 것은 더 바람직하지 않다. 국민을 위한 합의가 아니라 정치권의 이익을 위한 타협이라면, 그것은 협치(狹治)가 아니면 협잡(挾雜)이다.

‘바이든’의 해괴한 ‘날리면’ 둔갑, 해병대 박정훈 전 수사단장에 대한 외압, 김건희 여사의 논문 표절과 명품가방 사건 등 심오하지도 않은 블랙 코미디가 정치 무대를 장악하고 있다. 악은 평범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뻔뻔함에서 오는 것인가. 정권만 그런 것도 아니다. 사슴을 보고 말이라고 하는 권익위원들과 교수들까지 그 중요한 원인의 하나다.

대선 후보 시절 윤석열 대통령은 ‘특검을 왜 거부합니까? 죄가 있어서 그런 것 아닙니까!’라고 언성을 높였다. 그런 윤 대통령이 반부패 관련 특검법을 비롯해 민생, 인권과 관련된 법안에 대해 15번이나 거부권을 행사했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던 윤 대통령이 자신뿐 아니라 김건희 여사에게까지 충성하라고 강요한다.

시간은 그 자체로 흐르는 게 아니다. 이 때문에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것은 허상이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운동하고 변한다. 그 운동과 변화가 시간으로 인식될 뿐이다. 내일의 시간은 오늘의 운동과 변화에 의해 좌우된다. 내일이 두려운 이에게 시간은 빠르게 느껴지지만,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에겐 더디게 느껴진다. 남은 절반, 국민의 시간은 느리기만 한데, 대통령의 시간은 째깍째깍 빠르게 흘러간다.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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