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에서 그 광고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인지부조화에 빠졌다. 유명 연예인의 얼굴과 그 밑에 나란히 달린 ‘웨딩’ ‘어학’ ‘여행’ ‘상조’ 사이의 연관성을 전혀 알아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신문 하단의 통광고를 보았을 때도 비슷했다. 거기 적혀 있는 ‘액티브 시니어를 위한 라이프 스타일 채널’이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요즘 상조회사가 장례 주관을 넘어 ‘토털 라이프 케어 서비스’ 회사로 변신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신문 광고 역시 아동 학습지로 유명한 모 기업의 새로운 시니어 사업에 대한 것이었다.
2018년 포브스는 인구 고령화가 기업에는 축복이 될 것이라고 했고, 우리나라에서도 모 대학 고령사회연구센터가 ‘에이지 프렌들리’라는 주제로 고령화 트렌드를 분석한 보고서를 2022년에 발간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나이듦, 죽음, 돌봄 등의 기사를 꾸준하게 스크랩하는데 최근 2~3년 사이에 노인을 잠정적 고객으로 삼는 콘텐츠들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알다시피 지금까지 노년은 비생산적 인구집단으로 잔여적 복지의 대상이었다. 고령화 사회에서 오래 사는 노인들은 건강보험재정을 축내는 집단, 사회의 짐짝으로 취급되었고, 연금충, 틀딱, 꼰대, 할매미라 불렸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런 혐오 표현 대신 어르신, 액티브 시니어, 영 피프티, 뉴 그레이, 60대 힙스터, 신중년, 선배 노년 같은 단어들이 미디어에 등장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기업들의 ‘시니어 시프트’,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소비권력 5070’의 부상이 서로를 부추기며 노년 사회의 지형도를 바꿔놓고 있는 셈이다.
어떤 점에서 고령화 사회에 따르는 노인시장의 창출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휠체어나 보행기, 성인 기저귀 등 노인 일상용품, ‘뉴○○’ 같은 식사 대용식품, 노인 인지 저하를 막는 다양한 노인 학습지 같은 것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노인 마케팅은 차원이 다르다. 이들은 물건을 판다기보다는 차별화된 노인 이미지를 팔고 다른 노년과 구별짓는 라이프 스타일을 판다. 이제 액티브 시니어가 된다는 것은 시니어에 특화된 도슨트의 안내를 받으면서 미술관에 다니는 것이고, 양로원이 아닌 ‘시니어 레지던스’에서 산다는 것이며, 웰다잉 플래너의 도움을 받아 표준화된 장례가 아닌 프리미엄 스몰 장례 서비스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고령 사회, 65세 이상이 인구의 20%가 되면, 그것은 결코 하나의 범주일 수가 없다. 지금 60대는 피부양 세대라기보다는 80대의 부모를 돌보는 부양 세대다. 70대와 90대의 건강 상태는 판이할 수밖에 없다. 또한 현재 노인 빈곤율은 40.4%(2020년 기준)로 OECD 1위인데, 여성 빈곤율(60.3%)이 남성 빈곤율(30.9%)을 크게 상회하고 있다. 여성과 남성, 장애인과 성소수자의 나이듦 경로는 결코 같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소비 권력과 담론 권력을 가진 특정 노인이 노년 집단을 과잉 대표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노년 내의 차이는 무시되고 취약한 노인들의 삶은 더 철저히 지워진다.
나는 나이듦이 무시되는 세상에서 사는 것도 괴롭지만 나이듦 비즈니스가 활개 치는 세상에서 늙어가는 것도 두렵다. 나는 액티브 시니어라는 호명에 응답하면서 시니어 시장의 ‘호갱’이 될까봐 두렵고, 늙어서까지 지구 곳곳에 탄소 발자국을 남기는 소비자로 살게 될까봐 두렵다.
나의 롤모델은 영화 <모리의 정원>의 주인공인 늙은 화가 모리다. 그는 30년 동안 자기 집 정원 밖을 나가지 않았다. 하루 종일 자기의 작은 정원에서 아주 작은 곤충, 연못 속 송사리, 돌멩이, 풀, 개미를 관찰한다. 밖에 나가고 싶지 않냐는 부인의 질문에 그 정원도 자기에게는 지나치게 크다고 말한다. 사실 햇빛 한 조각, 바람 한 자락에도 우주의 비밀은 담겨 있다, 우리가 귀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액티브 시니어의 소비하는 노년의 삶. 생물학적 소멸에 맞춰 차근차근 실존적으로도 후퇴하기. 우주의 한 점 미소로 사라지기. 나이듦에 대한 나의 화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