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 이후 광복절은 ‘빛을 되찾은 날’이 아니라 국민이 갈라지고 역사해석에 대한 공통기반이 흔들리는 날이 되었다. 윤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재작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일제강점기에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며 국내외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신 분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하고 벅차오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이제 함께 힘을 합쳐 나가야 하는 이웃”이라고도 했다. 작년 경축사에서는 일본에 대한 언급을 줄이는 대신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세력들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고 한 뒤, 바로 소련공산당 참여 이력을 들어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했다.
올해 광복절은 뉴라이트 인사들의 역사 관련 기관 전면 배치, 광복회의 반발, 두 쪽 난 광복절 기념식으로 더 큰 회오리가 몰아쳤다. 윤 대통령은 “가짜 뉴스에 기반한 허위 선동과 사이비 논리는 자유 사회를 교란하는 무서운 흉기”라고 재차 강조했다. 이날 발표한 ‘8·15 통일 독트린’은 북한체제를 부정함으로써 7·4 남북공동성명, 6·15 남북공동선언에서 확립된 평화통일의 상식을 무너뜨렸다. 더 황당한 것은 “먹고살기 힘든 국민들에게 (건국절 논란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는 윤 대통령의 말이다. 그야말로 국민을 ‘소, 돼지’로 여기는 인식이다.
정작 건국절 논란이 소용없는 사람은 국민이 아니라 윤 대통령 자신이다. 애초에 대한민국 건국 시점이 1919년인지 1948년인지 크게 괘념치 않았을 것이다. 과거사에 얽매이지 말고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해 실리를 얻자는 정도였을 텐데, 부인 김건희 여사 문제에서 신뢰를 잃고 중도 확장에 실패하다 보니 확고한 지지층이라도 붙잡자는 생각으로 점점 기울어지면서 뉴라이트의 ‘숙주’가 된 것이다. 뚜렷한 정치적 소신 없이 ‘강직한 검사’로 박근혜 대통령을 무너뜨린 뒤 그 당 대선 후보가 된 그에게는 당연한 귀결이다. 박 대통령과 대립했던 이명박 대통령의 참모들이 뉴라이트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뉴라이트가 점점 더 나빠진다는 점이다.
뉴라이트, 즉 새로운 보수가 시작된 것은 2000년대 중반이다. 2004년 11월 신지호 대표의 자유주의연대, 2005년 1월 박효종·이영훈 서울대 교수의 교과서포럼 창립에 이어 2005년 11월 김진홍 목사가 뉴라이트전국연합을 출범시켰다. 2006년 4월에는 뉴라이트재단(이사장 안병직)이 창립됐다. 뉴라이트라는 명칭은 2004년 11월 동아일보에 처음 등장했는데 그 명칭을 도입한 이는 당시 이동관 정치부장(이명박 정부 홍보수석, 윤석열 정부 방송통신위원장)이었다. 이들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득세한 민주화세력이 경제발전을 폄훼하고 산업화세력을 반민주 독재와 동일시한다는 반감으로부터 이승만·박정희에 대한 긍정적 재평가, 식민지 근대화론, 급기야 1948년 건국절 주장까지 나아갔다.
건국과 건국절, 일제강점기 국적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뉴라이트 주장대로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됐다’는 말은 지금처럼 논란이 되기 전까지 보수와 진보 모두 통상적으로 쓰던 표현이었다. 단 제헌헌법과 이승만 대통령이 인정한 것처럼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 실질적인 현대국가로 건국했다는 것과, 그 이전까지 국가는 없고 일본 국적이었으며(사도광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논리) 새로 건국했다는 건 다른 이야기다. 굳이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자고 주장하지 않더라도 일본의 실체적 지배를 합법적으로 인정한다면 그건 뉴라이트이다. 홍범도를 넘어 안중근, 윤봉길, 김구까지 테러리스트로 만드는 논리다.
이렇게 뉴라이트가 나빠지기까지 진보 정부와 진보 지식인들의 문제는 없었는지도 묻고 싶다. 해방 직후 청산하지 못했던 친일의 범위를 확대하는 데 대한 국민적 합의가 부족하지 않았나? 굳이 ‘1919년 건국’을 공식적으로 강조해 불필요한 건국절 논쟁을 재발시키지 않았나? 나아가 분단체제와 동아시아의 긴장이 여전한 상태에서 그나마 뉴라이트는 20세기 역사를 붙잡고 있었지만 ‘뉴레프트’는 존재하기나 했나? 2000년 출간된 책 <한국 현대사상의 흐름>(윤건차 지음, 당대)을 다시 보니, 분단과 통일 문제가 여전한 상태에서 진보 지식계가 민족주의를 쉽게 청산하고 다양한 소수 담론으로 개별화, 전문화하는 데 대한 우려가 담겨 있다. 그 후 독립운동의 역사는 영화로, 뮤지컬로 ‘뉴에이지화’되었다. “피로 쓴 역사를 혀로 바꿀 수는 없다.”(이종찬 광복회장) 그러나 핏자국은 지워지고 혀는 계속 남아 국민을 혼란스럽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