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 미국 정부 초청으로 워싱턴과 뉴욕을 방문했다. 중견 언론인 10여명이 함께했다. 귀국길, 공항에서 출국심사를 마친 뒤 대부분 면세점으로 향했다. 남성 기자들은 아내나 딸에게 줄 가방이나 지갑을 골랐다. 한 여성 기자가 그들의 쇼핑을 ‘코칭’해주고 있었다. 본인 것은 안 사느냐고 물었다.
“남편 때문에 해외에서 아무 것도 안 산 지 오래됐어요.” 이 기자의 남편은 중앙부처 고위공직자였다. “본인 월급으로 사는 건데 어때서요?” 웃으며 답했다. “외국에서 뭘 샀다는 기록 자체를 남기고 싶지 않아요.”
더 오래 전 얘기다. 당시 대통령은 장관과 청와대 참모들을 이따금 부부동반으로 초청해 식사를 했다. 한 여성 참모의 남편은 매번 사양했다. 현직 법관이던 그는 ‘밥 먹으며 알게 된 사람 중 누군가와 법정에서 만나게 될 수도 있지 않겠나. 모르고 지내는 편이 낫다’고 했다.
예외적 사례일까. 그렇지 않을 터다. 지금도 고위공직자 배우자들의 대다수가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으리라 믿는다. 민간인인 배우자는 공직자인 배우자에게 피해 될까 염려해서, 공직자인 배우자는 자신의 공직윤리가 흔들릴까 다잡으려고.
‘김건희 여사 명품가방 수수 사건’에 대한 검찰의 무혐의 결정은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살아온 공직자와 가족들을 허탈하게 만드는 처사다. 대통령 배우자가 수백만원대 가방을 받는 장면을 온 국민이 ‘목격’했는데 아무 일 없이 마무리된다면, 공직윤리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게 분명하다.
검찰은 입법 미비를 탓한다. 청탁금지법(김영란법)에 공직자 배우자의 금품수수가 ‘공직자 직무와 관련해서만’ 금지되며, 이를 위반했다 해도 처벌 규정은 없다는 것이다. 박성재 법무부 장관이 국회에 나와 “제가 법을 만들어야 하느냐”고 큰소리친 배경이다.
무혐의 논리를 짚어보자. 수사팀은 김 여사가 재미교포 최재영 목사로부터 300만원 상당의 디올 가방을 받은 사실은 인정했다. 하지만 이 가방이 김 여사를 만나기 위한 수단이나 감사 표시였을 뿐 “청탁용이 아니”라고 봤다.
최 목사가 요청했다고 한 △김창준 전 미국 연방하원의원 사후 국립묘지 안장 △통일TV 송출 재개 등은 대통령 직무와 관련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윤석열 대통령이 금품 수수 사실을 신고할 의무도 없다고 결론내렸다. 요약하면 ‘단순한 선물 → 대통령 직무 관련성 없음 → 대통령 신고 의무도 없음’의 구조다.
이 사건은 실체 규명 자체는 어렵지 않다. 전달된 물품이 실재하고, 전달 과정을 보여주는 영상이 존재한다. 준 사람은 청탁 의사가 있었다고 했고, 받은 사람은 곧바로 돌려주지 않았다.
그러니 관건은 수사역량이 아니라 수사의지다. 윤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참여했던 국정농단 수사팀은 포괄적 뇌물·묵시적 청탁·경제적 공동체 등의 법리를 동원해 전 대통령 박근혜씨와 최순실(최서원)을 한데 꽁꽁 묶었다. 삼성이 말을 사준 대상은 최순실의 딸 정유라였으나, 말 구입비는 박근혜가 받은 뇌물액에도 포함됐다.
만약 윤 대통령이 현직 검사로서 대통령 배우자의 금품수수 사건 수사를 맡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청탁금지법에 처벌 규정이 없다’며 손털고 말았을까. 알선수재나 변호사법 위반 등 다른 죄명을 적용해 수사·기소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국정농단 사건의 법리를 원용하면, 대통령의 직무범위는 국정 전반에 걸쳐 포괄적이며 청탁·대가 관계도 그만큼 폭넓게 인정될 수 있다. 또한 그 배우자는 공무원(대통령) 직무와 관련해 ‘알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윤석열 검사’는 대통령이 배우자의 금품수수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파고들어 뇌물죄 적용 여부도 검토했을지 모른다. ‘오랜 지인’ 사이인 박근혜·최순실이 경제적 공동체라면 ‘부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으니.
“팩트와 법리에 맞는 판단을 내렸을 것.” 김 여사 무혐의에 대한 한동훈 대표 반응이다. 백보 양보해, 팩트와 법리 측면은 덮어둔다 치자. 그래도 외관의 공정성 문제는 남는다. 외관의 공정성이란, 수사·사법기관은 실제 공정해야 할 뿐 아니라 외관상으로도 공정하게 보여야 한다는 원칙이다. 한 대표도 “검사의 일은 ‘what it is(실체)’ 못지않게 ‘what it looks(외관)’도 중요한 영역”이라고 한 바 있다.
검찰은 ‘김 여사를 소환 조사했다’고 밝혔지만 말은 분명히 해야 한다. 김 여사가 수사팀을 ‘소환’했고 ‘조사를 허용’한 거다. 검찰청사가 아닌 대통령 경호처 부속건물에서 이뤄진 조사를 정상적 조사라 할 수 있나.
장소는 중요치 않다고? 수사는 고도의 심리전이다. 어디서 조사하느냐는 전투에서 유리한 진지를 구축하는 일과 밀접하다. 검사가 경호처 부속건물로 불려가 휴대전화까지 반납했다면, 적진에서 총기를 빼앗긴 채 싸우는 병사와 다를 바 없다. 이 상태에서 제대로 캐묻고 따지고 허점을 파고들 수 있었겠는가.
이원석 검찰총장이 김 여사 사건을 검찰수사심의위원회에 회부했다. 수사심의위는 ‘법 앞의 평등’이란 헌법 가치에 입각해 사법정의를 세워야 한다. 본연의 역할을 망각하고 절차적 공정성을 보완해주는 ‘액세서리’ 노릇에 그쳐선 안 된다.
국민권익위원회에 이어 검찰까지 김 여사에게 면죄부를 선사할 경우, 이는 한국 공직윤리에 대한 사망선고가 될 것이다. 검찰은 ‘무혐의 이후’를 책임질 자신이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