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 소방수이지 성장 촉진자는 아니다

2024.09.05 20:39 입력 2024.09.05 20:43 수정

[김학균의 쓰고 달콤한 경제]중앙은행, 소방수이지 성장 촉진자는 아니다

‘금리 인하 시기가 너무 늦어지고 있다’는 중앙은행 실기론이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대두되고 있다. 한국에선 내수 부진이, 미국에서는 고용과 제조업지표 악화가 중앙은행을 비판하는 논거들이다. 들썩이는 서울 부동산 시장과 얼마 전까지 나타났던 원화 약세를 감안하면 지금까지 기준금리를 동결해 온 한국은행 스탠스가 비난을 받을 만한 일인가 싶다. 미국에선 19일 새벽에 열리는 FOMC(연방공개시장위원회)에서 0.25%포인트가 아니라 0.50%포인트의 금리 인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금리 인하 타이밍을 놓쳤으니 이제라도 금리를 공격적으로 낮춰야 한다는 의견인데, 경제 운영에서 중앙은행이 차지하는 역할이 커지면서 다양한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중앙은행은 현대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위대한 제도이다. 중앙은행이 만들어지기 전과 후의 경제는 확연히 바뀌었다. 중앙은행은 특정 경제 공동체 내에서 통용되는 기준금리를 설정하는데, 시장에서 형성되는 금리는 두 가지 힘에 의해 결정된다. 금리는 돈의 가격에 다름 아니어서 사회 전반적인 자금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균형 금리가 만들어진다.

미국 금리인하 사이클 곧 진입

자금에 대한 수요는 돈을 빌리는 차입자 입장에서 금리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경기가 좋을 때 금리가 상승한다. 기업이 투자를 하거나, 가계가 소비를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데, 경기가 좋을 때 투자와 소비 수요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반대로 경기가 나쁠 때는 같은 논리로 금리가 하락하곤 한다. 국가 간 비교에서는 성장률이 높은 신흥국의 금리가 낮은 성장률의 선진국보다 높게 형성되곤 한다.

자금에 대한 공급은 돈을 빌려주는 채권자 관점에서 금리를 설명하는 요인이다. 그때 금리는 ‘빌려준 돈을 떼일 위험에 대한 보상’이다. 일종의 리스크 프리미엄인 셈인데, 신용도가 낮은 이들이 높은 이자를 내는 대부업체 등에서 차입을 하는 경우나, 유로존 재정위기 때 국가 신용도가 하락한 국가들의 국채 이자율이 급등했던 경우는 돈을 빌려주는 채권자의 입장이 금리에 투영된 사례들이다.

역사적으로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는 돈을 빌려주는 채권자들 이해가 금리에 강하게 투영되곤 했다. BC 3000년 바빌로니아 때부터 금리 기록이 문헌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바빌로니아 왕국, 고대 그리스, 로마 제국 등이 쇠락하는 국면에서 금리가 치솟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체로 재정 악화를 비롯한 경제력 쇠퇴가 권력 몰락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기존 질서가 붕괴되는 국면에서 경기가 좋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위기 국면에서의 금리 상승은 돈에 대한 수요 증가가 아닌, 여윳돈을 가진 이들이 자금 대여에 높은 리스크 프리미엄을 요구했던 현상으로 봐야 한다.

경기가 나쁠 때 금리가 상승하는 현상은 요즘 우리가 알고 있는 경제적 직관에 반하는 일이지만 역사 속에서 이런 일은 자주 나타났고, 그 결과는 경기 침체의 장기화이다. 경제위기가 닥치면 금리를 낮춰 수요 회복과 신용 여건의 개선을 도모해야 하는데, 오히려 금리가 상승하곤 했으니 침체의 골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중앙은행이 생기면서 이런 문제가 해결됐다. 사적 이해관계를 가지지 않는 중앙은행은 위기 국면에서 유동성을 공격적으로 경제에 주입할 수 있었다. 중앙은행의 역사적 책무는 민간영역 채권자들의 욕망을 억제하는 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기축통화국 중앙은행의 역할은 특히 더 중요하다. 미국의 연방준비제도는 1913년에 설립됐다. 대공황 때까지 연방준비제도의 역할은 제한적이었다. 금본위제가 당시의 화폐제도였기 때문이다. 돈이 금에 묶이면 중앙은행의 유동성 공급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1933년 미국 내에서 금본위제가 폐지되면서 중앙은행은 날개를 달았다. 금본위제 폐지 이후 중앙은행발 과잉 유동성으로 경제 전반의 불안정성이 높아졌다는 비판도 있지만, 단지 금속에 불과한 금에 돈이 속박되면서 불황이 장기화되는 것보다는 부작용이 훨씬 덜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실물경제·자산시장 불균형 지속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중앙은행의 역할은 ‘최종 대부자’라는 특수한 위기 국면에서의 소방수 역할을 넘어서고 있다. 중앙은행의 활동 범위는 훨씬 넓어졌고, 중앙은행이 풀어내는 유동성에 대한 각 경제 주체들의 중독증은 심해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과거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막대한 유동성이 풀려 흘러 다니고 있다. 중앙은행이 경제에 유동성을 공급하면 중앙은행의 자산이 늘어나게 되는데, 지난 8월 말 기준 미국 GDP 대비 연방준비제도 자산은 24.8%를 기록하고 있다. 그나마 경제에 풀린 유동성을 흡수하는 양적긴축 정책을 쓴 탓에 2021년 11월에 기록됐던 최고치 36.4%보다는 많이 낮아졌지만, 코로나19 팬데믹 직전의 18.9%보다는 훨씬 높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에는 이 비율이 6.0%에 불과했다.

유동성을 공급하는 방식도 파격적으로 바뀌었다. 중앙은행은 민간금융기관들로부터 특정 자산을 매입함으로써 경제에 유동성을 공급하는데, 통상 중앙은행은 만기가 짧은 국채와 정부기관의 보증이 있는 모기지 채권을 매수해 왔다. 부도 위험이 없는 절대적으로 안전한 자산이면서 만기가 짧아 이자율 변동 위험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중앙은행은 장기국채를 매입(양적완화)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 이외의 민간이 발행한 본질적으로 위험한 자산을 매수(질적완화)하기도 했다.

경기침체나 금융위기 심화를 막는 중앙은행의 노하우는 개선됐지만,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높이는 몫까지 중앙은행이 맡을 수는 없다. 오히려 과거 통상적인 경제 활동에 필요했던 규모보다 훨씬 많은 유동성이 상시적으로 공급(GDP 대비 중앙은행자산 비율 상승)되면서 꼭 필요한 구조조정도 지연되고 있다. 장기간 생존 가능하지 않은 플레이어들이 유동성의 힘으로 생존하면서 총체적인 경제활동의 효율은 떨어지고 있다. 미국 주식, 서울 부동산 등 일부 자산시장만이 유동성 증가의 풍선 효과를 누리고 있다. 풀린 유동성을 충분히 줄이지 못한 상황에서, 9월부터 미국은 다시 금리 인하 사이클에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 실물경제와 자산시장의 불균형은 앞으로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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