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해화(形骸化). 살과 정신은 스러지고 백골만 남았다는 섬뜩한 말이다. 방송통신위원회가 바로 그렇게 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야당 추천 위원 임명을 사실상 거부한 뒤, 전 정권이 임명한 위원장을 해임해 방통위를 정부여당 다수로 만들었다. 이후 야당은 정권 입맛에 맞출 수 없다며 새 위원 추천을 거부하는 한편, 대통령 지명 2인만의 방송장악을 막겠다며 새 위원장들을 거듭 탄핵소추했다. 현재는 실질적으로 위원 1명만이 남은 상태로 대한민국 방송통신 규제 기능 자체가 마비됐다. 이게 정상적 정부이고 나라인가!
정치적 다양성을 고려한 5인 합의제 기관에서 일부 위원만으로 의결하는 것은 문제 소지가 있다고 법원도 거듭 지적해 왔다. 지난달 행정법원은 방통위의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임명에 대한 집행정지를 결정했다. 법원은 결정문에서 소수의 참여를 원천적으로 배제한 상태의 의결은 “방통위법이 추구하는 입법목적을 저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구성원 모두가 납득되어야 하는 합치의 원리”가 핵심인 합의제에서도 다수결은 가능하지만, 그것은 소수의 참여가 보장되는 전제와 법적 한계 내에서만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위원 5명 모두가 있다고 해도 정부 여당 측 3명이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결정을 다수결로 내릴 수 있다. 그럼에도 관련 법이 굳이 야당 측 위원 2명을 두라고 정한 뜻은 정권을 쥔 쪽이 집단사고에 빠지지 말고 소수가 개진한 다른 견해도 숙의하라는 것이다. 싫어도 얼굴을 마주 보며 의견을 듣고 논박하라는 게 법 정신이다. 이 과정에서 공고했던 생각이 완화할 수 있으며 조금이라도 더 합리적인, 또는 덜 극단적인 안이 채택될 수도 있다.
사실, 공영방송 이사 선임 관련 업무는 방통위 설치법이 명시한 29가지 ‘심의·의결 사항’(제12조) 중 일부에 불과하다. 방송통신 규제와 관련한 더 많은 ‘중립적’ 사안을 다루게 되는 위원들은 상시적 대치 분위기에서는 효율적 의사결정 및 업무 수행이 어렵다. 심적으로도 버텨내기 힘들 것이다. 이런 이유로 공영방송 이사 선임 등 정파적 압력이 커지는 사안에서도 적대적 의사결정을 다소라도 순화할 수 있다.
지난 KBS와 방문진 이사 선임 회의에 야측 위원들이 있었다면 2012년 MBC 합법 파업의 원인 제공자들은 물론, 극단적인 정치 성향이나 공영방송 무용론을 드러내 온 인물들이 배제될 수도 있었다. 지원 서류에 충성 맹세 내용을 경쟁적으로 써넣지도 못했을 것이다.
방문진 이사 임명 집행정지에 대해 여당은 “인사권 집행이 사법부 결정으로 효력이 침해된 것은 3권분립 원칙에 반한다”며 도리어 법원을 압박하고 나섰다. 초등학교 때 배우는 것이지만, 법원을 따로 둬 행정부에 문제가 있다면 바로잡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이자 3권분립이다. “위법한 처분이 반복될 위험성이 있어” 그에 대한 “사법통제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법원의 지적을 받은 것은 크게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의결 불가능 상태가 된 방통위를 더는 방치할 수 없다. 모든 사달의 기원이 된 윤 대통령이 먼저 사과해야 한다. 민주당도 탄핵소추로 방통위원장 공석이 된 지금에야 위원 추천에 나서 2:2 여야 동수를 만들겠다는, 법 정신에 어긋나는 일도 멈추는 게 좋겠다. 그간의 추천 거부가 법 수호를 위한 저항이 아닌 정략적 선택이었던 걸로 해석될 수 있다. 이진숙 위원장도 사퇴하고 방문진 이사 임명 집행정지에 대한 항고도 취소해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야 한다. 그리고 “법대로” 국회 추천 3인과 대통령 지명 2인을 ‘전투력’이 아닌, 방송통신계가 인정하는 합리적 전문성을 지닌 인물들로 새로 뽑자. 극단적 대결의 무한 공명을 멈추고 다시 ‘합의제 정신’에 돌아가기로 ‘합의’하는 것만이 뼈만 남은 중요 정부 기능을 되살리는 해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