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6년, 효경교 붕괴 사건

2024.09.11 20:43 입력 2024.09.11 20:45 수정

1796년 음력 7월 말, 20대 나이에 종2품 전라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된 신홍주(申鴻周)는 사은숙배를 위해 청계천을 건너야 했다. 효경교(孝經橋) 초입에 들어설 때까지, 그의 머릿속은 조금 뒤 행할 의례 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왕에게 올리는 부임 전 인사지만, 궁의 예는 혈기왕성한 젊은 무관에게는 영 익숙지 않았다. 효경교 중간에서 그를 태운 말이 그를 떨어뜨리지 않았으면, 궁에 들어갈 때까지 그 생각은 멈추지 않았을 터였다.

다리를 건너던 중 갑자기 맞은편 말이 놀라 날뛰는 통에 신홍주의 말 역시 덩달아 날뛰면서, 그는 땅바닥에 내팽개쳐졌다. 효경교는 며칠 전 큰비로 난간 일부가 유실되었는데, 하필 그곳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신홍주는 다시 다리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수모를 겪었다.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젊은 무관이 말에서 떨어진 것도 모자라 다리 아래로 굴렀으니, 부끄러움을 감추기 힘들었다.

겨우 몸을 추스른 신홍주는 급히 금위영 장교를 불렀다. 큰비로 난간이 쓸려 내려간 지 며칠이 지났음에도 이를 수리하지 않은 사실을 엄히 꾸짖는 것으로, 부끄러움을 대신했다. 그리고 빠른 시간 내에 다리 난간을 수리하라고 분부했다. 수도 방위 책임을 맡고 있는 금위영 입장에서도 청계천 다리 관리는 중요했고, 이를 알고 있던 신홍주 역시 자신이 분부하기 편한 금위영을 선택한 터였다. 그리고 훈련원 도정으로 근무하고 있는 형 신응주(申應周)에게 이를 살펴봐 달라고 부탁했다.

신홍주가 전라도로 떠난 지 며칠 뒤, 한양에는 다시 큰비가 내렸다. 비가 그친 후, 동생의 말이 기억난 신응주는 급히 효경교를 찾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번 큰비로 그나마 남아 있던 난간 대부분이 유실되었다. 신홍주의 분부를 받은 금위영에서 손을 쓰지 않고 그냥 둔 탓이었다. 아무리 소속이 다르다 해도, 같은 군문의 병마절도사 분부마저 이행하지 않은 것이다. 기본적인 명령 체계마저 가동되지 않는 현실에 화가 폭발했다. 관할 군영 장교를 불러 매질하고, 사적으로 장정들을 동원해 남은 다리 난간 모두를 부수었다. 대부분의 난간이 유실되어 위험하기도 했거니와, 다리를 완전히 무너뜨려야 다시 지을 것 같기도 해서였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신응주의 일을 알 리 없던 도성 백성들은 무너진 다리를 보고 괴이하다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큰비로 멀쩡한 다리가 무너졌으니, 재이(災異)의 징조였다. 일시에 민심이 동요됐고, 조정에까지 보고되었다. 무너진 다리가 국가 문제로 번졌다. 결국 비변사가 조사에 나섰고, 신응주는 이 일이 자신으로 인해 일어났다고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의도가 옳았으므로 문제될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비변사의 보고는 신응주의 잘못에만 초점을 맞췄다. 동생이 다쳤다는 이유로 관할 군영 장교를 매질하고 밤에 몰래 장정들을 동원하여 다리 난간을 모두 부순 대범한 범죄자가 되어 있었다. 민심이 동요하자 비변사 역시 신응주를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듯했다. 정조 역시 신응주의 대담한 범죄행위에 놀랐다며, 비변사의 요청대로 처벌하라는 명을 내렸다. 신응주를 비롯하여 다리 난간을 부수는 데 참여한 장정들 모두는 북청부에 유배되었고, 이를 막지 못한 금위대장 등은 파직되었다(노상추, <노상추일기>).

사적으로 다리 난간을 부순 일이야 분명 잘못된 행동이다. 그러나 신홍주의 분부대로 효경교 난간을 금위영에서 미리 수리했더라면, 다시 비가 와도 문제될 일은 없었을 것이고, 일이 이렇게 커지지 않았을 터였다. 다리 관리에 대한 국가 시스템이 작동했다면, 신응주 개인이 이 모든 책임을 질 일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국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예나 지금이나 그 책임은 문제를 제기한 개인에게 전가되기 마련이다. 그것도 처벌이라는 가장 나쁜 방법으로 말이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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