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기온이 30도가 넘고 열대야가 계속되는 특별한 추석 연휴를 경험했다. 이파리가 여려서 강한 햇볕에 녹아버린 시금치는 한 단에 만원이 된 지 이미 오래고 차례상에 올려야 하는 고사리와 도라지도 한 줌에 만원씩이다. 물가는 둘째치고 건강 문제가 심각하다. 오랜 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올여름이 앞으로 가장 시원한 여름”이라는 말은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이렇듯 불길한 더위 앞에서 우리 사회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을까.
지난달 29일 헌법재판소는 청소년기후소송, 시민기후소송, 아기기후소송, 탄소중립계획 헌법소원 등 네 건의 기후 헌법소원을 병합해 일부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렸다. 국가의 기후위기 대응이 국민, 특히 미래세대의 안전한 삶을 보장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취지이며 구체적으로는 탄소중립녹색성장기본법 제8조 제1항이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35% 이상(시행령에서는 40%)의 이산화탄소 감축 목표만을 명시했을 뿐 2031년부터 탄소중립 목표연도인 2050년까지의 감축 계획을 마련하지 않은 것이 위헌이라는 내용이다.
판결문은 길고 어려워서 법률전문가가 아니면 제대로 이해하거나 해석하기 어렵다. 처음 판결이 나왔을 때는 2030년까지 40%의 감축 경로가 잘못됐다는 내용 등이 기각되어 ‘절반의 승리’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있었으나 점차 판결의 의미와 앞으로의 과제가 또렷해지고 있다. 요약하면 이번 헌재 판결은 당장 빚어질 혼란을 막는 선에서 기후위기의 실체를 법적으로 인정하고 시민사회가 국가의 대응의무 방기에 대해 압박할 수 있는 문을 열어놓았다.
전문가들은 헌재가 기후변화로 초래된 극단적 날씨, 물 부족, 식량 문제, 해안선 변화 등을 ‘생태붕괴 현상으로 인한 위험’으로 정의함으로써 기후위기 위험 상황의 존재를 인정하고 국가의 헌법적 보호 의무를 인정한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헌재가 사실상 처음 국민의 환경권을 인정하고 감축 목표를 사법심사 대상으로 판단함에 따라 앞으로 새로운 감축 목표가 나왔을 때도 헌법소원을 제기할 권리가 생긴 것이다.
2050년까지의 감축 경로와 관련, “과학적 사실과 국제 기준에 근거해 검토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언급한 사실도 주목받는다. 감축 계획의 근거인 탄소예산은 1.5도 제한선까지 인류가 배출할 수 있는 탄소량으로, 지구 전체 탄소예산에서 각국의 인구비례, 누적배출량 등을 계산해 국가별 탄소예산을 내고 이에 따라 감축 계획을 세워야 하는데 우리 정부가 이를 마련하지 않은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정부의 2030년까지 40% 감축 계획이 부실하다는 사실도 이번 판결에서 드러났다. 판결문에 따르면 기준연도인 2018년은 총배출량으로, 2030년은 순배출량으로 계산하는 바람에 실제 감축량은 29%, 많이 잡아도 36%라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이런 계산방식의 위법성은 위헌 정족수 6명에 못 미치는 5명에 그쳐 기각되고 결과적으로 현재 시행 중인 탄소중립기본계획이 그대로 인정됐다는 사실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31년 이후의 감축 경로를 세우는 과정에서 현재 정책에 대한 수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헌재는 위헌으로 판결한 탄소중립녹색성장기본법 제8조 제1항에 대해 2026년 2월까지 국회에서 개정하도록 했으며 특히 현실을 고려해 늘 소극적 입장인 행정부가 아니라 국회가 나서서 국민여론 등을 근거로 향후 감축 목표를 세우도록 했다. 이는 국회에서 두루뭉술한 법을 만들고 정부가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시행령으로 정책을 집행하는 시행령 정치를 막기 위한 법률유보(법률에 구체적 수치를 적시함) 원칙을 강조한 것이다.
이제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 지난 4·10 총선은 상당수 기후유권자가 등장한 기후총선이었으며 기후정치인들은 기후국회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그중에서도 기후문제를 전담할 국회 상설위원회를 만든다는 데는 국민의힘을 포함한 모든 정당이 동의했다. 거대양당의 정쟁으로 국회 개원마저 늦어진 마당이지만 이번 헌재 결정을 계기로 총선 당시의 약속을 지켜야 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2200여건의 기후소송이 벌어지는 가운데 아시아에서 처음 나온 기념비적 판결이다. 판결 직후 강남역 일대에서 열린 907 기후정의행진에는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3만명이 참여했다. 대만, 일본 등 아시아 환경운동가들이 일부러 찾아올 만큼 아시아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집회가 되었다. 기후는 시민사회의 저력을 모아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는 지렛대가 될 수 있으며 국민의 신망을 잃은 정치권에는 기후국회라는 기회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