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구공동체의 일원인 비장애인

2024.09.19 20:49 입력 2024.09.19 20:55 수정

가족·연인·친구가 장애인일 때

비장애인의 삶에도 큰 영향 끼쳐

억압·차별 깨달은 존재들의 연대

더 나은 사회 만드는 ‘불구공동체’

내가 집사로 있는 ‘읽기의집’ 이웃에는 발달장애청년네트워크 ‘사부작’이 있다. 여기서 발달장애인 동생을 둔 청년을 만났다. 그는 캐나다의 한 대학에서 ‘인권과 사회정의’를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 동생의 거처가 불안정해지자 일시 귀국한 모양이다. 다행히 동생은 ‘권리중심 중증장애인맞춤형 공공일자리’를 얻었고 지원주택에도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캐나다로 다시 돌아갈 준비를 했는데 날벼락이 떨어졌다. 서울시에서 권리중심 일자리 사업을 폐지하면서 동생이 일자리를 잃은 것이다. 그는 출국 일정을 미루면서 동생의 자립 상황을 계속 살피고 있었다. 이번 여름에는 나가야 한다고 했는데 무사히 출국했는지 모르겠다. 청년의 삶에서 동생이 차지하는 비중은 동생의 삶에서 장애가 차지하는 비중과 비례한다. “동생은 언제나 제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해요. 동생이 잘 지내느냐 못 지내느냐가 제 생활은 물론이고 건강까지 좌우하죠.” 그의 어린 시절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두 살 터울의 발달장애인 동생을 챙겨야 했던 어린 언니는 친구들과는 다른 학창 시절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세상에는 이처럼 비장애인인데 장애화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비장애인인데 장애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장애학자인 로버트 맥루어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신을 불구라고 주장하는 비장애인’이 있다. ‘자신을 불구공동체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는 비장애인’ 말이다(참고로 ‘불구’는 일반적으로 장애인을 비하하는 표현이지만 일부 장애인 운동가들은 자긍심과 저항의 의미를 담아 이 말을 쓴다). 대체로 장애인 가족이나 연인, 친구를 둔 경우에 그렇다. 이들은 삶의 방식과 진로를 정할 때 장애와의 연관을 피하기 어렵다.

이들만이 아니다. 내 주변에는 불구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많은 비장애인 활동가가 있다. 이들은 어떤 인연으로 장애운동에 뛰어든 후 장애인들과 함께 일하고 투쟁하며 살아가고 있다. 장애 문제가 자기 정체성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 장애인 차별 없는 세상을 자기 삶의 지향으로 삼는 사람들, 장애인들과 더불어 ‘우리’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 이들은 과연 장애인인가 비장애인인가.

사실 장애가 그 자체로 정체성인지는 논란거리다. 신체장애인과 정신장애인의 삶은 너무 다르고, 신체장애인이라고 하더라도 지체장애인과 감각장애인이 너무 다르며, 감각장애인이라고 해도 청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이 너무 다르다. 굳이 동일성을 찾는다면 이 사회의 시스템에 부합하지 않는 신체나 정신을 지녔다며 차별받는 이들이라는 점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내가 ‘불구공동체의 일원인 비장애인’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들이 감내했어야 할 희생이나 헌신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 이야기가 너무 순진하고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들의 존재에서 어떤 가능성을 생각하고 싶다. 장애인 차별의 근간인 ‘장애/비장애’의 이분법을 깨뜨리고, 우리 사회의 규범적인 정신과 신체 이미지 아래서 억압받고 차별받은 존재들의 연대를 구축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나니 더욱 앙상하게 들린다. 지금 내 말이 ‘우리 모두는 장애인이다’라는 식으로 장애인들이 겪어온 구조적 억압과 차별의 경험을 희석시키고 비장애인 관점에서 그것을 마음대로 전유하는 것이 될까 두렵다. 그럼에도 나는 자신을 장애인이라고 주장하는 비장애인, 불구공동체의 일원이 된 비장애인을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싶다. 이것은 내가 만난 사람들, 장애인야학과 같은 불구공동체의 (소극적) 일원으로서 내가 갖게 된 어떤 감각과 관련이 있다. 나는 이 공동체 안에서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걸 느낀다. 여기서 느낀 것, 여기서 알게 된 걸 모른 채로 살아가는 나를 도무지 상상하고 싶지 않다.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불구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은 내게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가.

물론 이 사회에서 장애와 불구가 행운과 얼마나 멀리 있는 말인지 알고 있다. 또 직접 겪어본 적도 없는 내가 장애인과 그의 가족, 연인, 친구들이 보낸 시간을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장애는 불운만은 아니며, 불구공동체에는 지금과는 다른 ‘우리’, 지금과는 다른 사회의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 나는 앞서의 청년이 인권과 사회정의를 공부하게 된 것이 동생 탓에 관심에 제약이 생겨서가 아니라 동생과 보낸 시간 덕분에 사람과 사회를 보는 시야가 열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눈이 이 사회를 더 낫게 만들 거라고 확신한다.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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