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수녀와 박인희는 풍문여중 시절 단짝이었다. 박인희의 생일날 이해인이 소월 시집을 선물하자 사진관에 가서 기념촬영을 하던 문학소녀들이었다. 박인희의 산문집 <우리 둘이는>에는 이해인 수녀와 나눈 손편지가 여러 편 담겨 있다.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기(旗)를 꽂고 산들 무얼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몸매를 감은/ 한 마리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얼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 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내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르는데….’
박인희가 낭송한 ‘얼굴’은 친구 이해인을 떠올리며 쓴 시다. 숙명여대 불문과 재학 시절인 1965년 써서 시화전을 통해 발표했다. 그러나 이 시가 박인환의 시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박인희가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을 낭송곡으로 발표하다 보니 ‘얼굴’도 <한국 대표시인 101인 선집-박인환 편> 등에 수록된 것이다. 한 번은 이해인 수녀가 성우 김세원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김세원이 낭송하는 ‘얼굴’을 들은 이해인이 감동을 받아 박인희에게 낭송해보라고 권했다. 그때서야 박인희는 이해인 수녀를 떠올리면서 자신이 쓴 시라고 얘기해줬다는 일화도 있다.
가수이자 시인, 방송 DJ로 한 시대를 풍미한 박인희는 1970년 혼성듀엣 ‘뚜와에 무와’로 데뷔한 이후 ‘모닥불’ ‘방랑자’ ‘끝이 없는 길’ 등 많은 히트곡을 냈다. 이런 가을에 어울리는 목소리를 잃지 않는 그의 콘서트는 매번 매진을 기록한다. 올드팬들에게 박인희의 노래와 낭송은 첫사랑과 동의어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