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겪는 일이지만 7, 8월이 되면 우리가 사는 조용한 바닷가 휴양지도 잠시 홍역을 치른다. 피서객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해수욕장은 물론, 호텔을 비롯한 민간 숙박시설과 레스토랑을 꽉 채운다.
한편으로는 조그마한 마을의 삶에 활기를 불어넣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소음과 쓰레기로 주민을 고생시킨다. 쓰레기 분리 배출을 하게 되어 있지만, 그들은 신경 쓰지 않고 아무 곳에나 쓰레기를 내던지고 사라져 환경미화원을 온종일 바쁘게 한다.
이들 가운데 제일 많은 영국인이 유별나게 웃통을 벗거나 비키니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해서 주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가톨릭 신앙이 뿌리 깊게 내려 보수적인 정서가 여전한 포르투갈에서 매년 이에 대한 경고가 있고, 이 지역에 이주해 온 영국인들이 부끄러운 이런 행동의 자제를 요구해도 별 효과가 없다.
수도 리스본이나 유서 깊은 항구도시 포르투는 비성수기에도 관광객이 너무 많이 몰리는 탓에 일상생활에 많은 지장이 있다. 작년 한 해 인구 54만의 리스본에는 약 600만명, 인구 23만의 포르투에는 약 230만명의 관광객이 찾았다. 이로 인해 주거·교통 시설, 그리고 환경 문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과부하 상태였다.
과도한 관광으로 허덕이는 유럽 도시나 지역으로 베니스, 암스테르담, 바르셀로나, 두브로니크, 레이캬비크 등이 최근 많이 거론되고 있다. 이 중에도 베니스를 가장 심각한 예로 든다.
50만 주민이 사는 이 수상도시의 한 해 관광객은 약 2000만명(이들 가운데 반 정도는 당일치기 관광객)이다. 이들이 산마르코 광장과 리알토 다리를 비롯한 몇몇 중요한 장소에 집중적으로 몰리다 보니 도시의 혼잡 정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또 모든 생활이 거의 관광산업에 묶여 있어 안정된 주거환경과 같은 주민의 요구는 실행 불가능하고 거대한 유람선의 정박으로 발생하는 공해 문제가 크며, 문화적 전통은 관광산업의 포장지 역할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베니스시는 2021년부터 거대 유람선의 입항과 정박을 제한했고, 올해 4월 말부터는 당일치기 관광객의 흐름을 조정하는 방안으로 ‘입장료’를 받아, 이 수입금을 지속 가능한 관광을 위한 재원과 관리에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에 대해 베니스가 입장료만 내면 즐길 수 있는 ‘테마파크’냐, 이동의 자유를 박탈하려 드느냐는 반발과 비판의 소리도 크다.
자기절제 대신 자아실현 의지 강해
관광이나 여행 열풍은 코로나 대재앙을 맞아 잠시 멈췄으나 지금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팬데믹 이전 수준에 도달하거나 이를 웃돌고 있다.
특히 중요한 관광지에 가면 중국, 인도, 브라질, 러시아,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지에서 온 여행객과 종종 마주친다. 이는 경제적 여유가 있어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중산층이 이제는 지구촌의 여러 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패키지 투어에 끼어 몰려다니는 예도 있지만, 이제는 몇몇이 또는 혼자 여행을 하는 사람도 과거와 달리 자주 본다.
이런 변화는 무엇보다도 교통과 정보 혁명이 과거와 달리 여행을 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여러 가지 여행정보를 얻고 저가 비행기 편을 이용하고 숙박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디지털 시대의 여행이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번창을 하는 관광이나 여행 문화에서 동시에 우리 시대의 진단을 위한 하나의 중요한 징표를 읽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개인의 체험이나 정서를 특별히 강조하는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과거에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던 자기 절제 대신 자아실현을 적극 강조하는 분위기도 이와 함께 강해졌다. 이는 특히 이른바 ‘MZ세대’(한국에서만 사용되는 세대 구분을 위한 조금 모호한 개념으로 1980년대 초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출생한 세대)에서 드러난다. 물론 이런 경향은 1960년대 말의 ‘히피 문화’와 같은 젊은이들의 저항문화에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소수자의 문화였다.
한마디로 여행이야말로 오늘날의 체험이나 정서 문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여행은 단순히 일상생활에 지친 심신을 휴양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삶에서 중요한 세계관의 형성에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자연과 공존’ 의무 마음에 새겨야
그래서 옛날부터 여행의 의미와 가치에 관한 수없이 많은 경구가 있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짧은 여행만으로도 자신과 세계를 변혁시키는 데 충분하다’거나 독일 철학자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가장 위험한 세계관은 세계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의 세계관이다’라는 경구도 이 중에 속한다.
그러나 여행이 삶을 위한 지혜, 기쁨, 만족, 열광, 감격과 같은 긍정적인 체험만 낳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의 바닥에는 실망, 좌절, 공포, 회의, 무의미함과 같은 부정적인 정서도 놓여 있다. 그래서 새로운 장소와 환경을 찾아 밖의 세계로 나선 여행이 자신의 내면세계를 돌아보게 하는 자기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다.
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여행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은 이 책의 한 페이지만 읽었다”고 여행의 의의를 적극 평가하면서도 “사람들은 스스로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시골로, 바닷가로, 산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그 어디를 가든 자기 자신은 그대로 따라간다. 그러므로 진정한 평온은 새로운 장소가 아니라 내면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감정을 이성적으로 절제하고 자연의 원칙에 따라 무엇보다도 자신의 통제를 강조한 스토아 철학을 신봉했던 그의 여행에 대한 생각과 겹치는 주장을 노자의 <도덕경>에서도 볼 수 있다. “문밖으로 나서지 않아도 천하를 알 수 있고, 창문 틈으로 내다보지 않고도 하늘의 도를 볼 수 있다. 멀리 나갈수록 조금 더 안다. 성인은 여행하지 않아도, 보지 않고도, 이름을 부르지 않고도, 하지 않으면서도 이룬다”는 구절도 무위자연의 원리를 따라 자기 자신의 내면세계로의 여행의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거의 모든 종교는 믿음의 체계에 따라 성스러운 근원을 찾는 성지순례를 중요시하는데 기독교도와 유대교도의 예루살렘, 이슬람교도의 메카, 부처가 태어난 보드가야, 힌두교도의 갠지스 강은 신도들에게 단순한 여행의 목적지가 아니라 자신의 신앙을 재확인하려는 내면세계로의 여행이다. 이들은 순례가 요구하는 고난과 인내의 과정을 자신의 영적 성장의 확인이라고 여긴다.
여러 경로를 통해 서북부 스페인에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을 목적지로 하는 ‘야곱스 길’을 매년 4000명에 가까운 한국인을 포함해 약 30만명이 찾는다. 중세부터 있었지만 1980년대 들어 많이 찾는 이 순례길을 따라 걷는 것은 꼭 신앙적 동기에서만이 아니라 자기 성찰과 치유를 위해서다.
그러나 동시에 네팔의 에베레스트 정상의 쓰레기 더미, 태국 피피 섬의 죽어가는 산호초, 사라진 잉카제국의 도시 마추픽추의 마모되고 침식되는 석조 구조물 등, 지구촌의 여러 곳에서 대량소비 시대의 체험문화 대명사인 여행이 낳고 있는 문제, 특히 환경 파괴와 공해의 심각성에 대한 경고가 나온 지 이미 오래다.
그래서 빨리빨리 더 많은 곳을 떼 지어 찾는 것이 아니라 한 장소에 머무르면서 지역사회의 문화와 역사를 경험하는 ‘천천히 하는 여행’이나 친환경적인 ‘에코 투어리즘’이 대안으로 등장했다.
이런 문제를 생각하면서 나는 제주도를 떠올린다. 곶자왈과 제2 공항 건설을 둘러싼 자연환경 훼손 문제, 소음과 쓰레기, 수질오염, 비싼 물가 등에 대한 보도를 접하면서 지구촌에서 관광지로 알려진 곳은 거의 예외가 없다는 생각도 든다.
현재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책적 대안도 대동소이하지만, 지속 가능한 여행의 기회는 여전히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여행에서 얻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의무를 우리 모두 지니고 있다. “나는 자면서 삶은 기쁨이라는 꿈을 꾸었다. 나는 깨어나 삶은 의무라는 것을 보았다. 나는 행동하면서 의무가 바로 기쁨이라는 것을 보았다”는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남긴 말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