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 30주기 ‘해남집회’를 다녀와서

2024.10.07 20:08 입력 2024.10.07 20:09 수정

“선생님, 저 잘했죠. 칭찬해주세요.”

2011년 겨울이었다. 희망버스 기획자라는 표적이 되어 수배생활을 마치고 부산구치소 7上1, 0.68평짜리 독방에 갇힌 첫날이었다. ‘철커덩’ 육중한 철문을 잠근 간수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쯤 나도 모르게 김남주 선생님께 독백처럼 건넨 인사였다. 이런 독방에서 9년3개월을 사셨을 선생님의 삶 앞에 조금은 부끄럽지 않고, 칭찬받고 싶은 날이었다. 선생님은 이 감옥이 “팔과 머리의 긴장이 잠시 쉬었다 가는 휴식처이고/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독서실이고 정신의 연병장”(‘정치범들’ 중)이라고 했다. 나는 이곳에서 어떤 꿈을 키워나가야 할까. 내심 꿈에 부풀기도 했던 날이었다.

김남주 선생은 내 삶의 이정표

그해 6차에 걸쳐 한진중공업 희망버스가 운행되었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매회 1만여명에 이르는 공권력을 투입하고 경찰 댓글부대를 운영하는 등 공안정국을 조성하며 희망버스를 막으려 했지만 자발적 연대자들로 이뤄진 희망버스는 멈추지도 타협하지도 않았다. 결국 조남호 회장이 국회 청문회장에 끌려나가 대국민사과를 하고 부당해고를 인정해야 했다. 재벌총수가 국회 청문회장에 출석한 건 14년 만이라고 했다. 19대 총선이 몇달 앞으로 다가와 있기도 했다. 보수의 아성이었던 부산을 근 한 달에 한 번씩 갈아엎는 희망버스의 힘 앞에 결국 정권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벗이었던 김주익 전 한진중공업 지회장이 목을 매달아야 했던 85호 크레인 위에서 고공농성 309일 만에 살아 제 발로 걸어 내려올 수 있었던 그해 11월10일은 한국의 노동자 시민들이 신자유주의 정리해고의 광풍에 맞서 싸워 오랜만에 승리한 날이었다. 한국사회 민주주의와 노동자 민중이 오랜만에 활짝 웃던 날이었다.

그 투쟁에 힘껏 함께한 후 결국 구속되던 날, 누구보다 김남주 선생님께 칭찬받고 싶었다. 20대 때 선생님을 만난 이후로 그는 내 삶의 이정표와 같았다. 흔들리거나 외로울 때마다 ‘전투적인 인간’을 찬양했던 선생님을 떠올렸다. 이런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끊임없이 그에게 길을 물었다. 어떤 투쟁 현장에서 다시 공권력과 격돌을 해야 할 때면 눈을 한 번 감고 선생님의 선하던 얼굴을 떠올리는 게 싸움을 목전에 둔 나의 한결같은 제의였다. 또 한 사람의 열사나 전사를 떠나보내야 하는 눈물겨운 추도식장에서 추모시를 낭송해야 할 때마다 연단으로 오르기 전엔 꼭 눈을 감고 선생님의 얼굴과 육성을 떠올렸다. “어느 시대 어느 역사에서 투쟁 없이/ 자유가 쟁취된 적이 있었던가.”(‘나 자신을 노래한다’ 중) 지금 내가 읽어야 할 시는 추모시가 아니라 동지의 시, 투쟁의 시, 옛 전사들의 뜻을 잇는 시여야 한다고 마음속 결기를 다지곤 했다.

다시 변혁의 길을 찾아 나설 때

그런 선생님이 저 하늘로 가신 지 올해가 30주년이라고 했다. 그의 꿈은 모두 이루어졌는가. 제국주의의 야만은 세계적으로 잦아들었는가? 조국은 하나가 되었는가? 민주주의는, 자유는 확장되었는가?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고 괄시받던 민중의 삶은 나아졌는가? 물어보고 싶었다. 익천문화재단 길동무의 김판수, 염무웅 두 선생님께서 길을 열어주셨고, 25명의 청년 작가·활동가가 김남주 이후 한국사회와 현재의 우리를 조망하는 기획연재를 오마이뉴스에 해주고 있다. 광복절 전날인 8월14일에는 청계천에서 서울 추모제를 치르고, 지난 9월26일에는 해남에서 열린 김남주 30주기 추모제에 함께했다.

다시 제국주의 광풍이 전 세계 여기저기를 휩쓸고, 한반도의 정치·군사적 긴장 또한 극으로 치닫고 있는 때. 이상한 대통령이 다시 등장해 여러 민주적 사회운동에 대한 공안몰이를 하며 모든 민주주의가 거부당하는 참혹한 때. 1100만명 노동자들이 신종 노예에 다름없는 비정규직 불안정노동자로 내몰려 있는 때. 우리는 추모제가 아니라 옛 동학군의 ‘보은집회’와 같은 ‘해남집회’를 하러 온 듯하다는 염무웅 선생님의 말씀이 죽창 날처럼 서늘했다. 여전히 초라한 선생의 해남 생가 뜰에서 울컥, 추모시를 읽지 못하고 눈물 흘리던 황지우 시인을 따라 모두가 눈물짓기도 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사상의 거처>를 찾아 나서야 할까. “잡초는 어떻게 바위를 뚫고/ 박토에서 군거하던가/ 찔레꽃은 어떻게 바위를 뚫고/ 가시처럼 번식하던가.”(‘잿더미’ 중) 추억하는 것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을 터이므로 다시 새로운 변혁의 길을 찾아, 나서야 할 때이다.

송경동 시인

송경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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