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중지권은 이번 미국 대선의 주요 쟁점 중 하나다. 한국의 관점으로는 체감이 쉽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임신중지권 이슈의 영향력은 지난 선거에서 실증되었다.
대통령 임기 중 첫 중간선거는 정권 심판 구도로 치러지고 집권당이 보통 패배한다. 클린턴, 오바마, 트럼프 모두 중간선거에서 하원 수십석을 잃고 하원의장을 야당에 넘겨주는 일을 겪었다. 2022년 중간선거에서 바이든 역시 같은 운명을 맞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보수 우위 연방대법원이 2022년 6월 돕스 판결을 통해 임신중지를 여성의 헌법상 기본권으로 인정했던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파기했다. 여성과 진보 성향 유권자의 반발이 투표로 표출되며 민주당은 하원에서 단 7석만 잃었고, 공화당은 하원 다수당을 탈환했지만 사실상 패배한 것으로 평가된다.
임신중지권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근본적 가치에 관한 문제이자 미국 사회에서 수십년 동안 치열하게 다투어져온 헌법적 쟁점, 사회·문화적 이슈다. 하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측면은 임신중지권은 단순한 이념 전쟁이 아니라 여성의 현실적 삶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문제라는 점이다.
임신과 출산 자체가, 더욱이 원하지 않는 임신과 출산이라면, 여성의 삶에 결정적이고 되돌릴 수 없는 영향을 미친다. 최저임금이 얼마냐, 감세냐 증세냐, 우리 주에 제조업 일자리가 생기냐 같은 차원을 애초부터 뛰어넘는 문제다. 미국 여성 약 3분의 1이 임신중지가가 전면 금지된 중·남부에 거주한다. 누구나 비행기를 타고 동부나 서부까지 가서 임신중절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임신중지권은, 한국 정치의 용어로 표현하면, ‘민생’이자 ‘먹고사는 문제’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념 문제를 가지고 연방대법원에서 50년 동안 싸우거나 특정 정당을 혼내주려고 투표장으로 향하지 않는다. 자기 삶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니까 그렇게 한다.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이른바 ‘먹사니즘’이 원내 제1당의 유일한 이데올로기라고 한다. 그런데 미국의 임신중지권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민생 또는 먹고사는 문제는 단순히 금액으로 계산되는 정책, 세금을 낮추거나 없애는 쟁점에 국한되지 않는다.
대법원은 장애인을 위한 경사로 설치 등 편의제공 의무의 구체적 기준을 정하는 시행령이 24년간 개정되지 않은 것에 관해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되는지 여부를 놓고 10월23일 공개변론을 연다.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은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의무를 부담하는 소매점 범위를 직접 규정하지 않고 대통령령에 위임했다. 제정 당시 시행령은 편의시설 설치의무를 부담하는 소매점의 기준을 바닥면적 합계 300㎡ 이상으로 했는데, 이는 24년간 개정되지 않다가 2022년에야 바닥면적 합계 50㎡ 이상으로 확대되었다. 그동안 대다수 편의점은 적용 범위에서 제외되어 장애인의 접근권이 보장되지 않았다.
10월4일 JTBC 뉴스에 “아이 키우기 좋은 나라? 유모차 끌고 지하철 타니 절망”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는 아쿠아리움, 키즈카페가 있고 유아용품 박람회도 종종 열리는데, 지하철 삼성역을 통해 진입하려면 ‘마의 12계단’을 통과해야 한다. 기자가 직접 아이를 유아차에 태우고 가보니 1분30초면 갈 수 있는 거리에 8분10초가 소요되었다.
이런 문제는 겉으로만 보면 소수자 보호에 관한 진보 이슈, 기업 활동의 자유를 제약하는 규제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2023년 기준 등록장애인은 264만명으로 전체 인구 대비 5.1%이고, 저출생 문제 해결은 한국의 최우선 과제다. 이를 민생과 무관한 문제라고 단순히 얘기할 수 없다.
차별금지법에 대해서도 ‘먹고사는 문제가 급하다’고 대응하는 경우가 있다. 미국의 1964년 민권법은 모든 사람이 인종과 피부색에 관계없이 식당 등의 다중이용시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고, 성별과 관계없이 교육과 고용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도록 만들었다. 민권법은 정의로울 뿐만 아니라 모두의 삶을 바꾸는 입법이었다. 차별 해소를 기반으로 한 다양성의 나라 미국이 전 세계의 인재를 어떻게 흡수하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전 국민의 1%나 부담할까 말까 한 세금 이슈만 민생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경제 활동과의 직접적 연관성이라는 기준으로 먹고사는 문제와 그렇지 않은 문제로 가를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중요한 민생 문제가 많고 국민의 삶을 더 낫게 만들어야 할 영역과 방법 역시 다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