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금융위기 이후의 글로벌 경제는 미국의 독주로 표현될 수 있을 듯하다. 셰일오일의 등장으로 에너지 자립도가 높아졌고,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을 중심으로 플랫폼과 인공지능(AI)으로 이어지는 우리 시대의 기술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여기에 중국과의 갈등을 빌미로 보호무역적 기조를 강화한 데 이어 글로벌 분업 체제의 인위적 재편을 통해 세계의 투자를 자국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미국을 제외하면 대부분 국가들이 이런저런 걱정과 위기감 속에 살아가고 있다. 특히 유럽 경제를 이끌어왔던 독일 경제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독일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지난해 -0.3%라는 역성장을 한 데 이어 이번주 독일 재무부가 제시한 2024년 전망치도 -0.2%이다.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이 예상되면서 1990년 통독 직후 들었던 ‘유럽의 병자’라는 오명이 다시 소환되고 있다.
중국 경제에 대한 노출도가 컸던 터라 중국 경기 둔화의 직격탄을 맞고 있고, 적성국으로 변해버린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가 크다는 점, 제조업에서 디지털로의 전환이 더디다는 점이 독일 경제의 부진을 설명하는 논거들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독일 경제를 두고는 비관론이 비등하고 있지만, 독일 증시는 강력한 상승세를 지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독일 증시를 대표하는 DAX지수는 지난 9월 말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기록적 경기 후퇴 속 증시는 활황
GDP와 주가가 등치되는 개념은 아니지만, 두 지표의 극심한 괴리도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주가는 국민경제의 체온을 보여주는 온도계’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투자공학적으로 이런 괴리를 설명할 수 있는 포인트는 ‘주가지수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사실이다. DAX지수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증시에 상장돼 있는 40개 종목의 주가를 기준으로 산정된다. 지수에 편입된 종목들은 고정돼 있는 게 아니라 늘 바뀐다.
실적이 양호한 기업은 신규 편입하고, 부진한 기업은 지수에서 제외하는 교체작업이 일상적으로 이뤄진다. 한국 배달앱 시장 점유율 1위인 ‘배달의 민족’ 대주주는 독일 주식시장에 상장된 ‘딜리버리 히어로’다. 딜리버리 히어로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음식 배달 사업이 빠르게 성장해가던 2020년 9월18일 DAX지수에 새로 포함됐다. 이후 비즈니스의 성장 속도 둔화가 가시화되자 2022년 6월20일 DAX지수에서 빠졌다. 딜리버리 히어로를 대신해 DAX지수에 편입된 회사는 의료용품 제조업체인 ‘바이어스도르프’였다. 바이어스도르프는 DAX지수에 편입된 후 42.3% 상승했지만 같은 기간 딜리버리 히어로 주가는 10.4% 오르는 데 그쳤다.
실적이 악화되는 종목은 제외하고 양호한 종목은 편입시키면서 시장 대표 주가지수가 장기적으론 상승해온 사례는 너무도 많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GDP가 2년 연속 역성장을 하는 경기 침체 국면에서 주가지수가 상승하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다. 2차 세계대전의 폐허를 딛고 경제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던 1960년대 이후 독일(통일 이전에는 서독 기준) GDP 성장률이 2년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한 시기는 통독의 후유증이 이어지고 있었던 2002~2003년이 유일했는데, 당시 DAX지수는 29%나 하락했다. 이와 달리 2023~2024년에는 사상 두 번째의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이 유력하지만 DAX지수는 38%의 상승률을 보이고 있다.
과거 어느 때보다 경제에 풀린 돈의 양이 많다는 사실이 실물경제와 대비되는 자산시장의 호황을 설명할 수 있는 요인이 아닌가 싶다. 길게 보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짧게 보면 코로나19 팬데믹 시작 직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중앙은행발 유동성 폭증이 있었다.
중앙은행 대차대조표상 자산은 발권력을 가진 중앙은행이 맨 처음 경제에 주입한 본원통화에 가까운 개념이다. 민간은행들은 이를 기반으로 신용을 창출해 새로운 돈을 만들어낸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중앙은행이 풀어낸 본원통화 규모는 압도적으로 커졌다. 유로존 GDP 대비 유럽중앙은행(ECB) 자산 비율은 2024년 8월 말 기준 44.7%에 달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 이 비율은 13.5%에 불과했다. 팬데믹 국면에서 풀린 유동성을 흡수하기 위해 2023년 3월부터 양적긴축 정책을 시행하고 있지만, 여전히 유로존 GDP 대비 ECB 자산 비율은 팬데믹 직전이었던 2020년 2월의 38.9%보다 높다. GDP로 대표되는 실물경제 대비 화폐영역에서 풀리는 돈이 훨씬 빠르게 증가한 것이다.
‘승자의 기록’만 보여주는 주가지수
풀린 돈은 어디로 갔을까? 지역과 국가를 막론하고 부채가 많이 늘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GDP 대비 경제주체들의 합산 부채비율은 거의 모두 100%를 넘어서고 있다. 자산시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론적으로 GDP 대비 부채비율이 100%를 넘을 수 없다. 부채를 일으킨 플레이어가 빌린 돈을 그대로 들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금융기관을 제외할 경우 빌려주는 돈(대체로 은행 예금)보다 빌린 돈(대체로 은행으로부터 차입)의 이자율이 더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빌린 돈으로는 이자로 지불될 차입비용보다 더 큰 증식이 가능할 자산을 구매해야 한다. 부채가 GDP를 초과한다는 사실은 누군가는 수익을 창출할 자산이 아닌 공돈을 들고 있다는 의미이다. 존재하는 실물자산은 GDP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주식·부동산과 같은 자산시장이 존재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GDP를 넘어서는 누군가의 차입금은 자산시장에 투자된 것으로 볼 수 있어서다. 매우 이례적인 독일 실물경제와 주식시장의 괴리는 늘어난 유동성의 풍선효과로 해석할 수 있다.
기록적인 경기 후퇴 국면에서도 독일 주식시장은 상승하고 있지만, 한국 주식시장이 부진한 이유는 무엇일까? 특히 코스닥시장이 심각한데, 상장된 종목은 너무 많고, 부실한 종목들이 상존하면서 지뢰밭에서 거래가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주가지수는 ‘승자의 기록’과 ‘패자의 잔해’가 혼재돼 있다. 또한 중앙은행의 유동성 확충이 기축통화국인 미국, 준기축통화권인 유로존, 일본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적 한계도 한국 주식시장의 부진한 성과로 귀결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