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어는 1990년대 말을 지나면서 서남 해안을 넘어 전국적으로 인기를 얻은 물고기다. 서남 해안의 전어는 한때 거저 나눠 먹을 만큼 흔했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전국구의 귀하신 몸이 됐다. ‘집 나간 며느리’ 하는 허튼소리를 낀 먹방의 영향이 컸다. 그 전어가 올해 수도권에선 품귀란다. 이유야 복잡할 테고, 어업과 유통에 어두운 책상물림은 답답할 뿐이다. 그래도 마산만을 중심으로 한 남해의 전어 잡이는 이전과 다름없다니 다행이다.
한반도의 전어는 제주도 바다와 한반도 서남동해 사이를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한다. 산란기는 초여름부터 8월까지 이어진다. 전어는 봄에 하구 또는 연안의 만(灣)에 붙어 여름을 나고 수온이 떨어지면 다시 밖으로 빠져나간다. 요컨대 전어는 하구와 만에서 알도 낳고 몸도 키운다. 이윽고 추석 지나 훌쩍 더 자란 전어는 11월 들어 그 기름기가 절정에 달한다. 서유구(1764~1845)는 <난호어목지>의 전어 항목을 이렇게 썼다.
“서해와 남해에서 나는데 몸이 납작하고 등마루가 높고 배가 불룩하다. (생김새가) 붕어 종류와 비슷하지만 등마루의 가는 지느러미가 꼬리까지 이어진다. 입하(立夏) 전후에 매년 (연안으로) 와 풀이 있는 물가에서 진흙을 먹을 때 어부가 그물을 쳐 잡는다. 살에 잔가시가 많지만 부드러워 목에 걸리지 않으며 씹기 좋고 기름지고 맛있다. 상인들이 소금에 절여 서울로 가져와 파는데 신분이 높거나 낮거나 모두 좋아한다. 그 맛이 좋아서 사는 사람들이 값을 따지지 않기 때문에 ‘전어(錢魚)’라고 한다.”
전어의 모습은 서유구가 묘사한 대로다. 동물성·식물성 플랑크톤 및 유기물을 펄과 함께 먹어치우는 전어의 먹이활동에, 여름에 연안에 붙었다 잡히는 풍경 또한 그야말로 딱 맞아떨어진다. 전어는 전어(剪魚)·전어(全魚)·전어(典魚)로도 썼다. <자산어보>는 ‘전어(箭魚)’로 썼다. 다 크면 25㎝까지도 자라는 물고기가 전어다. 특히 마산만 일대에서 늦가을 이후에 잡히는 3년 이상 자란 큰 전어는 ‘떡전어’라고 하여 전어 중의 전어로 친다.
먹을거리의 전국적 유통은 시대를 타게 마련이다. 오희문(1539~1613)은 임진왜란 피란일기인 <쇄미록>에 “듣자니 시장에서 전어 큰 놈 한 마리에 쌀이 석 되(聞, 場市錢魚, 大一尾價米三升)”라는 한마디를 남겼다. 그러고 보니 오희문은 서유구보다 150년 앞서 전어에 ‘돈 전(錢)’을 붙였다. 아무튼 팔도를 굽어본 서유구의 기록을 따르면 한반도의 전어는 조선 후기 첫 소비 전성기를 누린 셈이다.
오늘날 한국인은 여름 앞뒤로는 뼈째 썬 회와 통째로 먹는 소금구이를 즐긴다. 그렇다면 늦가을 지나 가시가 억세지면? 이 즈음 전어는 그 살에 맛난 맛과 기름기가 오를 대로 올라 있다. 거기 착안하면 그만이다. 살만 떠 회를 썰거나, 채쳐 새콤함과 매콤함을 더해 회무침을 하거나, 보기 좋은 칼집을 내 굽거나, 초밥을 쥐거나 짙고 달큰한 전어의 풍미와 부드러운 질감이 어디 갈 리 없다. 말 꺼내고 보니 전어젓, 전어속젓, 전어의 위만 모아 담근 전어밤젓(전어돔배젓)까지 삼삼하다. 여름에 이어 다시 전어의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