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영국의 노예제 폐지서 얻는 교훈

2013.08.04 21:39 입력 2013.08.04 23:58 수정
강경선 | 방송대 법학과 교수

노예제 폐지와 관련해 영국이 미국에 비해 32년이나 먼저 이루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만 영국의 윌버포스는 대부분 모른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21세에 하원의원이 돼 45년 동안 노예제 폐지를 필생의 목표로 삼은 인물이다. 결국 의원 활동 20년 만에 노예무역제 폐지를 실현했고(1807년), 노예제 폐지(1833년) 후 며칠 뒤 세상을 떠난 훌륭한 인물이다.

물론 윌버포스의 힘만으로 노예제가 폐지된 것은 아니다. 그에게 영향을 준 존 뉴턴 목사, 그랜빌 숍, 클락슨, 런던협회, 클라팜회 등과 같은 선구적인 노예반대 운동을 펼친 인물과 단체들이 있었다. 퀘이커교는 아예 교리로 노예를 반대하고, 이주지역이던 펜실베이니아 지역을 자유지역으로 만든 전례를 남긴 바 있다.

[기고]영국의 노예제 폐지서 얻는 교훈

이 시기의 영국 총리는 피트였다. 피트는 24세에 총리가 돼 세계 최연소 총리 기록을 가진 인물이다. 피트와 윌버포스는 동기였고 절친이었다. 전기를 보면 젊은 나이에 정계에 입문한 두 사람이 마치 도원결의나 하듯이 노예제 폐지를 위한 약속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보수적 성격의 토리당 소속이었으며, 총리를 친구로 두고 있었음에도 윌버포스가 추진한 노예제 폐지의 길은 이렇게 장구한 세월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래 스페인, 포르투갈로부터 시작된 노예무역과 노예제는 당시의 중상주의 시대 경제의 중심이었다. 최대 노예무역국은 곧 당대의 최강국을 뜻했다. 영국은 북아메리카와 서인도제도를 식민지로 두고 아프리카로부터 이곳에 노예를 공급했다. 1660년쯤부터 1807년까지 약 150년 동안 노예무역이 행해졌고, 이 기간에 1200만명 이상의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팔렸다. 그런데 최대 노예무역국가였던 영국에서 최초로 노예무역과 노예제가 폐지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논쟁이 있다.

경제주의에 입각한 설명은 노예제가 이미 쇠락기에 접어들었고, 수익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일찍 폐지했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틀린 설명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직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발전한 시기가 아니었다는 점과 노예제를 통해 한동안 더 수익을 얻을 수 있었던 때라는 점을 감안하면 경제주의적 설명은 미흡하다. 그래서 영국의 노예제 폐지에 대한 설명에는 보편적 규범, 도덕성, 휴머니티와 같은 근대적 헌법가치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다. 국가와 회사, 농장주들이 이윤동기에 눈이 멀어 노예를 짐승이라 규정짓고 자기정당화를 해야만 했던 위선과 미개의 시대를 대신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논할 수 있는 새 시대가 도래하자 노예제의 존재 명분이 안개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주목할 것은 이런 보편적 규범, 헌법적 가치를 가장 먼저 실현한 나라가 영국이라는 점이다. 영국은 당시 정치적·경제적으로 최강국이었다. 최강국은 경제력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도덕적 우위, 보편적 규범을 가장 많이 보일 수 있어야만 최강국으로서의 권위가 서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영국은 다른 강대국이었던 프랑스나 네덜란드, 독일, 그리고 신생국이었던 미국에 앞서 노예무역제와 노예제를 과감히 폐지하고 국제정치무대를 선도해 나갔다.

노예제 폐지를 위해 영국은 기존의 주인들에게 줄 보상금으로 당시 2000만파운드를 준비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영국은 그후에도 1세기 동안 세계 최강국의 지위를 누렸다. 우리 국민들도 대한민국이 정치·경제 선진국이 되기를 바란다면 경제력 키우기에 힘을 쏟는 이상으로 사회의 민주화, 인권, 반부패 등의 보편적 헌법가치들을 실현하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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