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조문외교

2019.06.12 20:43 입력 2019.06.12 20:51 수정 양권모 논설실장

죽은 이에 대한 예의 차원인 ‘조문’과 총성 없는 전쟁인 ‘외교’가 이율배반적으로 결합되는 조문외교. 세계 외교사 페이지에는 조문외교의 성패를 보여주는 사례·교훈이 빼곡하다. 1980년 5월 티토 유고 대통령 장례식에는 58명의 정상이 참석해 ‘인류의 정상회담’이라는 말이 나왔다. 장례식을 계기로 동·서독 정상회담도 열렸다. 주인공은 단연 소련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비동맹 노선의 상징 티토 장례에 나타난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다. 반면 부통령을 파견했던 카터 미국 대통령은 조문외교 실패 비난에 시달렸다. 1989년 2월 히로히토 일왕 장례 때 조문외교의 주역은 첸치천 중국 부총리였다. 중·일관계가 해빙되는 계기가 됐다. ‘놀랍게’ 당시 한국에서는 강영훈 국무총리가 조문사절로 갔다.

조문외교가 극한 논란을 겪은 경우가 1994년 북한 김일성 주석 장례 때다. 김영삼 정부는 외교가 아닌 정치로 개입했고, 정상회담을 할 뻔한 남북관계는 이후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상처를 입었다. 반면 미국 클린턴 행정부는 애도 성명을 발표하고, 갈루치 국무부 차관보가 제네바 북한대사관으로 가서 조문했다. 이를 비난하고 나선 공화당을 뉴욕타임스가 사설로 꼬집었다. 사설 제목은 ‘어이, 이 양반아. 그런 게 외교인 거야’.

북한은 1994년 문익환 목사 별세 때 김일성 주석 명의의 조전을 시작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때 고위급 조문단을 파견하는 등 남북관계에서 중요 역할을 한 남측 인사들에게 적극 조의를 표해왔다.

고 이희호 이사장에 대한 높은 수준의 조문이 기대된 것도 그 때문이다. 고인은 2000년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2011년 12월26일에는 김정일 위원장 빈소를 찾아 상주인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났다. 박지원 의원이 “정치적 의미를 떠나 반드시 조문사절을 보내야 한다”고 할 만했다. 북한이 어제 판문점에서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을 통해 김정은 국무위원장 명의의 조화와 조의문을 전달했다. 4월 이후 일체의 남북 접촉을 끊고 있는 북한이 부담스러운 조문단을 피하면서 고인에 대해 예를 갖추는 방식을 찾은 셈이다. 조문외교의 신종을 찾을 만큼 작금의 남북관계가 미묘하다는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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