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에 따라 어울리는 꽃이 있다. 어버이날에는 부모님 옷깃에 달아드리는 카네이션이 있고, 성년의날을 맞은 이들에겐 열정과 사랑을 담은 장미를 선사한다. 사회생활에서 승진, 영전, 취임, 개업 등을 축하할 땐 난(蘭)이 보편적이다. 동양란은 지조·절개, 서양란은 아름다움·행운 같은 꽃말을 갖는다. 주는 이들이 이런 뜻까지 헤아려 고르진 않았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난 선물은 관행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정치권에서도 축하용으로 난이 애용된다. 대통령이나 정당 대표들은 배달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고 누군가를 직접 보내 난을 전달한다. 그런 점에서 난의 ‘정치 꽃말’은 소통일 수 있다. 1997년 5월 김영삼 대통령은 정무수석을 보내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의 대선 후보 선출을 축하하는 난을 전달했다. 1987년 후보단일화 실패, 1992년 대선 맞대결 등으로 불편했던 두 사람 사이에 난이 화해의 메신저가 됐다는 말도 나왔다. 2016년 2월 김종인 민주당 비대위원장이 비서실장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의 64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난을 보내려 했지만 정무수석이 세 차례 거절했다 뒤늦게 받은 것은 당시 정국의 ‘불통’ 기류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윤석열 정부에서 난이 수난을 겪고 있다. 윤 대통령이 지난 5월 말 22대 국회의원 300명 전원에게 ‘국회의원 당선을 축하합니다’란 글귀가 적힌 난을 보냈으나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가 “거부권을 오남용하는 대통령의 축하 난을 정중히 사양한다”며 수령을 거부했다. 조 대표는 지난달 대표로 재선출된 뒤에는 홍철호 정무수석이 들고온 윤 대통령의 축하 난을 받았다.
이번엔 민주당과 대통령실이 축하 난을 두고 옥신각신하고 있다. 대통령실은 지난 19일 홍 정무수석이 연임한 이재명 대표에게 대통령 명의 축하 난을 전달하려고 수차례 연락했지만 민주당이 답을 주지 않았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정무수석의 이 대표 예방 일정을 조율 중이었지만 축하 난 전달과 관련해선 어떤 대화도 나눈 바 없다”고 맞섰다. 어느 쪽 말이 맞는지는 알 수 없으나 느닷없는 ‘축하 난 진실 공방’은 한국 정치의 살풍경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에게 금란지교(金蘭之交·우정 어린 친구)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기본적인 매너는 갖춰져야 정치가 작동할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