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부각 원치 않는 베트남
미국 등 다른 참전국 입장 고려
발언 수위 조절…우회적 “유감”
문재인 대통령이 23일 쩐 다이 꽝 베트남 국가주석을 만나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분명한 사과를 한 것은 아니지만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현직 대통령으로는 세번째로 베트남전 당시 학살에 사실상 사과한 것이다. 당초 문 대통령은 좀 더 분명한 사과를 하려 했으나 여러 요인을 고려해 발언 수위를 조절한 것으로 전해졌다.
문 대통령은 이날 하노이 주석궁에서 꽝 주석과 정상회담을 하며 “우리 마음에 남아 있는 양국 간의 불행한 역사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한다”고 말했다. 명시적인 ‘반성’과 ‘사과’라는 표현 대신 외교에서 우회적 사과로 해석되는 ‘유감(遺憾)’이란 표현을 택했다. 유감 표명의 대상은 ‘양국 간 불행한 역사’로 간접적으로 지칭했다. 꽝 주석은 “과거사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진심을 높이 평가한다”고 화답했다.
문 대통령의 유감 표명은 두 전직 대통령의 관련 발언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인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4년 “우리 국민이 마음의 빚이 있다. 그만큼 베트남의 성공을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당초 문 대통령은 한국군에 의한 학살의 상처가 있는 베트남인들에게 분명한 사과를 하고 싶어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두고 일본 측에 진정한 반성을 촉구한다든지, 국내적으로 제주 4·3, 광주 5·18 등의 국가폭력을 사과해야 한다고 강조해온 문 대통령으로선 당연한 수순이었다.
국내 시민단체들도 문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해 분명한 사과를 전하기를 기대했다. 한·베평화재단 이사장인 강우일 가톨릭 제주교구장은 베트남 순방 전 문 대통령에게 보낸 공개 편지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베트남 방문에서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감’ 표명보다 더 진정성 있는 사과를 통해 평화 외교의 모범을 보여주길 기대한다”고 했다.
하지만 베트남은 1992년 한국과 수교할 당시부터 승전국 입장에서 굳이 사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었으며, 이번에도 한국 정부가 사과 의사를 타진하자 난색을 표했다. 아울러 미국, 뉴질랜드, 태국 등 참전국들이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만 사과하기도 곤혹스럽다. 베트남 정부 입장에선 당시 내전의 기억이 자국민들의 생채기를 건드려 그 화살이 국가를 향할 가능성도 우려한다. 문 대통령은 그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피해 당사자들에게 사과하고 싶다는 뜻을 재차 밝혔고, 결국 양측은 정상회담에서 유감 표명을 하는 선에서 타협했다.
두 정상은 과거 상처를 짧게 언급하고는 대부분 논의를 미래지향적 협력에 할애했다. 특히 양국은 정상회담에서 채택한 ‘한·베트남 미래지향 공동선언’에서 “6만여 한·베 다문화가정의 여성과 아동을 지원하고 돌보는 정책 강화를 위해 노력해 나가기로 했다”며 “한·베 2세들이 양국 경제사회 발전을 위한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도록 이들을 교육하는 데 지원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