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2018년 공동선언·군사합의 6주년
정부 “힘에 의한 평화”, 북 “핵무력 증강”
군사합의 파기로 무력 충돌 위험 커져
북·미 협상 대비해 북과 대화 공간 확보해야
남북 정상이 2018년 평양에서 공동선언과 군사합의를 체결한 지 6주년을 맞았다. 당시 남북은 한반도의 비핵화를 위해 긴밀히 협의키로 했고, 무력 충돌 위험을 감소하기 위해 군사행동을 자제키로 합의했다. 남북관계의 주요한 전환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19일 현재 이들 합의는 휴짓조각이 됐다.
남북이 각각 “힘에 의한 평화”와 “핵무력 증강”을 외치면서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경색됐다. 대화는커녕 소통 창구까지 막혔다. 정부가 한반도 정세를 안정시키고 향후 북·미 협상 국면에서 외교적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북한과 대화를 보다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9년 9월19일 평양에서 발표한 ‘9월 평양공동선언’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북한의 비핵화 관련 내용이다. 남북은 한반도를 핵무기와 핵 위협이 없는 평화적 터전으로 만들어나가기로 하면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긴밀히 협력하기로 했다. 남북이 구체적인 비핵화 방안에 합의한 건 처음이라 의미가 컸다. 북한이 한국의 ‘중재자’ 역할에 기대를 걸고 있다는 점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됐다. 북한은 과거 비핵화 문제에서 한국을 당사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공동선언의 부속합의서인 ‘9·19 군사합의’는 지상·해상·공중에 완충지대를 설정해 군사행동을 금지하는 게 핵심 내용이다. 군사합의는 남북 간 긴장 고조와 우발적 충돌을 예방하는 최소한의 ‘안전핀’ 역할을 했다.
그러나 북한은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미국과 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결렬되면서 비핵화 협상 의지를 접었다. 미국은 물론 한국을 향해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이후 김 위원장은 2021년 1월 제8차 당대회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기술 고도화와 전술핵무기 개발 등을 목표로 제시했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각종 군사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윤석열 정부도 지난 정부의 남북관계를 ‘가짜 평화’로 규정하고 ‘힘에 의한 평화’를 추구했다. 정부가 내놓은 대북정책 ‘담대한 구상’은 한·미 동맹을 바탕으로 북한을 압박해 대화에 나오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북한은 이에 반발했다. 북한은 지난해 말 남북을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했고 이후 물리적 단절을 위한 조치를 진행하고 있다. 또 남측을 ‘남조선’ 대신 ‘한국’이나 ‘대한민국’으로 지칭하고 있다.
남북 간 대치 국면은 9·19 군사합의가 사실상 파기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정부는 지난해 11월 북한의 군사정찰위성 발사를 계기로 군사합의상 비행금지구역 조항의 효력을 정지했다. 그러자 북한은 곧바로 군사합의 파기를 선언했다. 그리고 정부는 지난 6월 북한의 잇따른 오물풍선 살포 등을 이유로 군사합의 전체의 효력을 정지했다. 정부는 “남북 간 상호 신뢰가 회복될 때까지”라는 단서를 달았으나, 사실상 폐기한 것이란 평가가 나왔다. 정부는 군사분계선 일대와 서북 도서 등에서 훈련을 재개했고, 대북 확성기 방송도 재가동했다. 북한은 각종 미사일의 시험발사와 함께 최근까지도 오물풍선을 띄우고 있다. 남북의 통신선도 모두 끊긴 상태라 우발적 충돌이 확전할 가능성이 커졌다.
특히 북한은 오는 10월7일 최고인민회의(남측의 국회 격)에서 단절된 남북관계를 반영해 헌법을 개정할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은 이 헌법을 근거로 대남 위협 수위를 높일 가능성도 점쳐진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한·미동맹과 대북 태세를 유지하는 것과 별개로 남북 간 확전 가능성을 줄일 수 있도록 정부가 적극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필요가 있다”라며 “남북이나 북·미가 군사적 위협을 감소하기 위한 군사회담 같은 형식의 대화가 필요하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북한은 핵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히면서 핵무력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북한은 최근 핵탄두에 들어가는 핵물질인 고농축 우라늄(HEU) 생산 시설을 최초로 공개하면서 핵무기 제조 능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향후 미국과 협상을 하더라도 비핵화가 아닌 핵군축이 의제가 돼야 한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당선되면 미국이 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할 수 있다는 전망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아울러 남북관계가 악화일로인 상황에서 한국이 북·미 협상에서 원천 배제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이 경우 북·미 협상 결과가 한국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북·미가 미국 본토까지 날아가는 ICBM만 동결키로 하면서 주한미군 감축 등에 합의한다면, 한국 안보의 불안정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정부 소식통은 “북·미 협상에서 한국이 완전히 제외된다면 외교 실패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북·미 협상이 시작되면 북한은 남측의 관여를 수용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을 북한과 미국이 쥐게 된다”라며 “대북 강경책으로 일관하지 말고 ‘플랜B’를 만들어서 한국이 패싱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