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 표가 세상은 못 바꿔도 내 삶을 나아지게 해줄 거라 믿는다”

2022.03.08 21:07 입력 2022.03.08 21:15 수정

내가 투표를 꼭 하는 이유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정재욱씨, 정한비씨, 경재준씨, 문수영씨, 김현지씨, 정다연씨, 임정수씨, 김승연씨, 장명석씨, 차의창씨, 김원호씨, 김장려씨.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정재욱씨, 정한비씨, 경재준씨, 문수영씨, 김현지씨, 정다연씨, 임정수씨, 김승연씨, 장명석씨, 차의창씨, 김원호씨, 김장려씨.

첫 투표한 10대 “교육·젠더·장애인·청년 공약 살펴봐”
50대 회사원 “소신 투표, 내 가치관 지켜내는 행위”
40대 간호사 “보건 정책, 삶에 끼치는 영향 피부로 느껴”

20대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둔 8일 유권자들은 “뽑을 후보가 없다”거나 “상호 비방이 너무 심하다”면서도 내가 아닌 모두를 위해 투표에 참여하겠다고 말했다. 태어나서 처음 투표장에 들어가는 이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다양한 가치의 공존을 희망하는 이들은 소신을 지키려고, 생업 전선에 선 이들은 자신을 지킬 울타리를 만들기 위해 한 표를 행사하겠다고 했다.

■ ‘공약’을 유심히 본 생애 첫 ‘주권 행사’

10대 유권자들은 ‘생애 첫 투표’에 의미를 두었다. 만 18세 유권자인 정재욱군(18)은 남들보다 빨리 투표하고 싶어 지난 4일 하굣길에 사전투표를 했다. 친구들과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뽑는 투표”라는 말도 했지만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한 준비는 누구보다 꼼꼼히 했다. 정군은 ‘교육과 젠더’라는 두 가지 공약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봤다.

정군에게 첫 주권 행사는 만감이 교차하는 자리였다. 1분 만에 끝난 투표에 허무감도 들었다. 하지만 나도 내 의견을 표현할 수 있게 됐다는 만족감이 더 컸다. “저희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가장 큰 수단이 투표라고 생각해요. 혼자 길거리 가서 떠드는 경우는 조금만 울려퍼지지만 투표를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으니까요.”

정한비씨(19)는 소속 정당을 따지기보다 후보 공약 위주로 살펴봤다. 대학에서 복지를 전공하는 그는 장애인 공약을 중요한 선택 기준으로 고려했다. 정씨는 첫 선거를 마친 소감을 묻자 “설렜다. 결과를 떠나 모두가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나 하나 투표해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 오히려 한 명, 한 명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투표를 통해서 내가 원하는 미래를 말하는 후보를 선택해야 한다고 봐요.”

윤영헌씨(19)도 비슷한 생각을 내놨다. 윤씨는 “이번 대선 후보들의 토론도, 선거 유세 과정도 너무 갈등적이었지만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제 의견을 조금이라도 반영하기 위해 투표장으로 향했다”고 했다. 윤씨는 대선 후보들의 청년정책과 코로나19 관련 보건의료 정책을 세세하게 따져봤다.

■ 젠더·환경·동물…“투표는 소신 지키는 일”

당선 가능성보다는 후보의 가치와 공약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회사원 경재준씨(27)는 “후보별 세대관, 젠더관, 노동관 등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관점에 제 나름의 우선순위를 부여해서 뽑았다”고 말했다. 경씨가 특히 중시하는 것은 ‘젠더 이슈’다. “대학교 다닐 때, 대학 커뮤니티나 사적 모임 등에서 젠더 문제로 갈등을 빚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적어도 제 세대의 가장 큰 갈등 중 하나가 젠더인 것 같아요. 차기 대통령이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다룰지에 따라 앞으로 관련 정책도 많이 바뀔 것 같아요.” 경씨는 “원하지 않는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표심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득표율로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사무직 노동자인 문수영씨(58)는 사회적 다양성을 염두에 두고 한 표를 던지겠다고 했다. 그는 “제가 딸이 있는데, 여성의 인권이나 난민 문제 등 사회적 약자의 다양성을 중점에 두고 한 표를 행사하고자 한다”며 “투표는 이런 제 가치관을 지켜내는 행위”라고 말했다. 이어 “‘내 표가 사표가 될 수 있으니 투표하지 않겠다’는 말은 최대한 지양했으면 한다”면서 “어디에 어떻게 투표를 하든 각자의 한 표가 갖는 상징성을 좀 더 적극적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기후활동가인 김현지씨(22)는 전 지구에 엄습한 기후위기 관련 공약을 최우선 기준으로 삼아 사전투표를 했다. 그는 “대선 후보별로 기후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이 어느 정도인지를 주요하게 고려했다”면서 “경제만을 중요시 여기는 후보보다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사회를 추구하는 후보, 퀴어·여성·동물의 곁에 함께 서겠다는 후보를 지지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못해도 기권표라도 던져야겠다’는 마음으로 이번에 기표소에 들어섰다고 했다. “기권이든 지지든, 투표를 통해 시민이 여기 존재하고 있으며 정치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드러내고 싶었어요. 이번 선거가 어떤 종착지가 아니라, 한국이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고민하는 하나의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여야의 상호 비방 때문에 오히려 후보들의 공약에 관심이 생겼다는 이들도 있다. 연구직 종사자인 정다연씨(32)는 “사실 (뽑을 사람이 없어) 기권하려는 마음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여성을 깎아내리는 주요 정치인의 발언이나 여권 신장에 역행하는 공약을 보고 ‘반드시 투표하러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정씨는 “각 정당별 여성정책도 처음 살펴보게 됐다. 적어도 내게 이번 대선은 여성으로서 나의 존재가 여기에 있음을 증명하는 선거”라고 했다.

경기 고양시에 거주하는 임정수씨(52)도 “솔직히 이번 선거유세 동안 대선 후보들의 논란상을 보면서 유권자로서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다”며 “하지만 만일 선거권조차 행사하지 않으면 차기 대통령이 어떤 국정운영을 하든, 차기 정부를 비판할 자격도 잃는 것이라는 생각에 투표장에 가야 한다는 마음을 굳혔다”고 말했다.

■ 내 삶을 바꾸는 정치…“코로나로 정책 영향 실감”

자신의 직업적 관심사를 투표와 연결짓는 유권자도 있다. 치과의사인 김승연씨(27)는 후보별 의료·보건 공약을 주요하게 봤다. 김씨는 “1인 가구가 수술이 필요할 때 보호자 동의 없이 수술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공약은 좋은 쪽으로 기억에 남았다”며 “의료 민영화와 맞닿은 공약들은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의료 민영화는 시대를 역행하는 공약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수도권 소재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장명석씨(42)는 ‘간호사들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할 대통령이 누구일지’ 고민했다. 장씨는 “수년간 일선 현장에서 코로나19를 겪다보니 정부가 펼치는 (보건의료) 정책이 제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는지를 피부로 느꼈다”며 “정책과 제 삶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다보니 이전 대선보다도 더 관심을 갖고 들여다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더 나은 의료현장을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적극적인 후보에게 투표할 생각이라고 했다. “간호사들의 업무 현장이 더 나아지길 바라는 제 마음을 비롯해 세상이 지금보다 더 나아지길 바라는 표가 모아지다보면 분명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번 대선에서도 그러길 바라고요.”

서울 마포구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차의창씨(60)는 이전 정부의 정책과 각 당이 지난 5년간 보여온 모습 등을 기준으로 투표하겠다고 했다. 차씨는 “자영업자지만 코로나19로 상황이 힘들더라도 정부 지원이 마냥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며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것도 적잖은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60년 평생 한 번도 빠짐없이 기표소에 개근했다는 그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투표라는 건 나를 위한 선택이라기보다 내 미래 혹은 내 다음 세대를 위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선택이 투표에 담겼다고 생각해요.”

한 표 한 표가 모여 만들어낼 변화와 발전을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다. 12년차 택시운전사인 김원호씨(65)는 “투표 하나로 나라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 표가 모여서 정치 발전이 이뤄진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거주하는 김장려씨(81)는 “내 표 하나로 세상이 바뀔 일은 없겠지만 표 하나가 다른 사람들 것과 합쳐지다보면 (세상도) 바뀌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투표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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