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약도 모른 채 투표?…소외 받는 시각장애인들

2022.05.30 21:33

광역·기초의원 후보, 음성·점자 공보물 제작 ‘의무’에서 빠져

올해 ‘점자’ 제출 25% 그쳐…‘음성’에는 신상정보만 제공 돼

2년 전 시정 요구에 선관위 “일정 빠듯”…여전히 개선 안 돼

대구 달서구 주민 강창식씨(41)는 6·1 지방선거 사전투표가 진행된 지난 27~28일 당혹스러운 일을 겪었다. 시각장애인인 강씨가 거소투표를 하려는데, 일반 투표용지를 제공받은 것이다. 강씨는 투표용지상 후보자 파악부터 기표까지 투표 과정 전반에서 활동보조인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강씨는 30일 기자와 통화하면서 “비밀선거가 지켜지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강씨는 후보자들의 공약을 파악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그가 후보자의 신상과 공약을 알 수 있도록 점자 공보물을 보낸 후보자는 3명에 불과했다. “어떤 사람은 공보물에서 보이스아이 코드(문자를 음성으로 변환해주는 바코드)를 찍어보라는데, 저 같은 사람은 어디에 바코드가 있는지도 알기 어려워요. 바코드 위치를 못 찾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1995년 첫 지방선거가 실시된 후 여덟번째 지방선거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지만 시각장애인들은 지역구 후보자의 정책조차 알기 어렵다. 광역의원(시·도)과 기초의원(시·군·구), 교육의원 후보에겐 점자 공보물 제작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현행 공직선거법상 대통령과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교육감 선거 후보자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점자형 공보물을 작성·제출하거나 그 내용을 음성·점자로 확인할 수 있는 QR코드 등을 공보물 책자에 표시해야 한다.

기자가 이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관련 자료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이번 지방선거에 출마한 총 6054명 후보자 가운데 선거공보 제출 시한인 지난 20일까지 점자형 공보물을 제출한 후보는 1536명(25.37%)에 그쳤다. 2018년 지방선거 당시 점자형 공보물 제출 후보자 비율은 33.03%였다. 시각장애인 유권자의 참정권 보장 방안이 4년 전보다 후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초의원 후보자들의 제출 비율은 18.61%에 그쳤다.

시각장애인의 이 같은 정책 소외 현상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이 없지는 않다. 한 예로 선관위는 홈페이지 정책·공약마당에 PDF 공보물을 등재하기에 앞서 후보자들에게 문자인식이 가능한 형태로 제출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센스리더’ 등 시각장애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음성 변환 프로그램이 텍스트를 읽어내는 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보자 상당수는 여전히 음성 변환이 불가능한 이미지 파일을 제출한다.

선관위는 올해부터 점자형 공보물과 함께 이동식저장장치(USB)도 시각장애인 유권자에게 제공하고 있다. 이 역시 의무사항은 아니다. 음성 변환이 어려운 이미지 파일만 존재하는 경우도 많다.

이연주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사무총장 대행은 통화에서 “지방의원들을 점자 공보물 배부 의무 대상자에 포함하는 입법이 필요하다”며 “공보가 점자로 제공되는 경우에도 내용이 부실하거나 (비장애인 유권자에게 제공되는) 책자형 선거공보와 다른 경우가 많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점자 공보물보다는 음성 파일을 더 적극적으로 제공해달라는 주문도 있다. 서울 송파구에 거주하는 시각장애인 A씨(66)는 “점자 공보물이 와도 다 읽지를 못한다”면서 “차라리 음성 파일을 의무적으로 넣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강씨처럼 거소투표를 진행하는 시각장애인 유권자에게 점자 투표용지가 제공되지 않는 사례에 대해선 이미 2020년 9월 국가인권위원회가 인권침해라는 판단을 내린 바 있다. 당시 선관위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취지로 답변했지만 인권위는 “기간이 부족하다면 그 기간을 늘리는 방법을 강구할 수도 있다”고 재차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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