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투옥 불사’ 유리창 깨며 여성 참정권 투쟁…영국·조선 여성을 깨우다

2020.11.24 06:00 입력 2020.11.24 11:34 수정
장영은

나혜석을 사로잡은 에멀라인 팽크허스트

에멀라인 팽크허스트(1858~1928)는 체포와 투옥을 불사하면서도 공고한 기득권 사회와 싸워 여성 참정권을 쟁취한 운동가였다. 사진은 1914년 대표단을 꾸려 국왕을 만나러다 버킹엄궁 앞에서 체포되고 있는 팽크허스트의 모습.

에멀라인 팽크허스트(1858~1928)는 체포와 투옥을 불사하면서도 공고한 기득권 사회와 싸워 여성 참정권을 쟁취한 운동가였다. 사진은 1914년 대표단을 꾸려 국왕을 만나러다 버킹엄궁 앞에서 체포되고 있는 팽크허스트의 모습.

여성사회정치연합 비폭력 운동
법안 도입 미적대는 정치에 분노
“일어나라 여성이여” 실력 행사

“내가 런던 체류할 동안, 영어를 배우기 위하여 여선생 하나를 정했다. (…) 팽크허스트 여자 참정권 운동자 연맹회 회원이요, 당시 시위운동 때 간부였었다. (…) 그는 이런 말을 한다. ‘여자는 좋은 의복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을 절조(節調)하여 은행에 저금을 하라. 이는 여자의 권리를 찾는 제1조목이 된다.’ 나는 이 말이 늘 잊히지 아니하고 영국 여자들의 선각(先覺)에 존경 않을 수 없다.”(나혜석, ‘베를린에서 런던까지(伯林에서 倫敦까지)’, 삼천리, 1933년 9월)

나혜석은 1928년 7월 영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그해 8월15일까지 런던에 체류했다. 그녀가 런던에서 ‘팽크허스트 여자 참정권 운동자 연맹회’의 일원을 만나 “내가 조선의 여권운동자 시조가 될지 압니까”(‘영미 부인 참정권 운동자 회견기’, 삼천리, 1936년 1월)라고 선언한 대목을 읽을 때마다 전율을 느낀다. 나혜석이 런던에 도착하기 약 한 달 전인 1928년 6월에 영국 여성 참정권 운동을 이끌었던 에멀라인 팽크허스트는 세상을 떠났다. 나혜석은 ‘선각자’를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그녀는 에멀라인 팽크허스트를 깊이 ‘존경’했다. 말이 운명을 결정지었던 것일까? 나혜석은 ‘조선의 여권운동자 시조’가 되었다.

에멀라인 팽크허스트도 자신의 삶을 예언했다. 그녀는 1914년에 출간한 자서전 <나의 이야기(My Own Story)>(번역본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에서 창문을 깨뜨려 가면서라도 여성 참정권을 외면하는 정부와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교도소를 수시로 드나들어야 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사실, 에멀라인 팽크허스트는 어린 시절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읽은 순간부터 “투쟁이 초래한 파괴의 상흔을 보상하고 치유하는 부드러운 마음씨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고자 노력했다. 무엇보다 여성 참정권 획득이라는 정치 운동의 목표를 비폭력 합법 노선으로 관철시키고자 했다. 그런데 왜 그녀는 갑자기 투쟁의 방식을 바꾸게 되었을까?

에멀라인 팽크허스트는 1858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태어났다. 유복하고 지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어느 날, 아버지는 딸이 잠든 줄 알고 그만 “얘가 남자애로 태어나지 않아서 안됐어”라고 혼잣말을 내뱉었다. 어린 딸은 눈을 감은 채 평소에 “남녀가 평등하게 참정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던 아버지의 ‘슬픈 목소리’를 그저 듣기만 했다. “남자들은 자신들이 여자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반드시 입증하리라고 다짐한다.

[여성, 정치를 하다](15)‘투옥 불사’ 유리창 깨며 여성 참정권 투쟁…영국·조선 여성을 깨우다

위 사진은 교도소에 수감된 팽크허스트(왼쪽)와 그의 딸 크리스타벨. 아래는 거리에서 손팻말 시위 중인 여성사회정치연합 회원.

위 사진은 교도소에 수감된 팽크허스트(왼쪽)와 그의 딸 크리스타벨. 아래는 거리에서 손팻말 시위 중인 여성사회정치연합 회원.

최초 여성 선거권 법안 초안한
팽크허스트 변호사 만나 결혼
두 아이 출산 뒤 다시 현장으로

에멀라인 팽크허스트는 1870년대 초반에 영국의 어떤 지역보다 활발하게 참정권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던 맨체스터를 사랑했다. 당대 최고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이자 훌륭한 웅변가로 꼽혔던 리디아 베터의 연설을 쫓아다니며 들었다. 15세에 프랑스 파리의 “여학생을 위한 고등교육 분야에서 유럽의 선구자 역할을 한 학교에 입학”한 에멀라인 팽크허스트는 공화주의 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접하며 자유주의적 사고를 더욱 확장시켰다. 18세에 맨체스터로 돌아와 “최초의 여성 선거권 법안 초안을 작성한” 팽크허스트 변호사를 만났다. 3년 후인 1879년에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 연이은 출산으로 “몇 년간 가정사에 깊이 몰두”할 수밖에 없었지만, 에멀라인 팽크허스트와 그녀의 남편은 여성이 “가정만 지키는 기계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에멀라인 팽크허스트는 여성참정권협회의 실행위원으로 근무하는 한편 기혼여성재산법 제정을 위한 위원회에서 남편과 함께 활동했다. 1882년 기혼여성재산법이 통과되자, 그녀는 오로지 참정권 운동에 힘을 쏟았다.

에멀라인 팽크허스트는 1886년 가족들과 함께 런던으로 이사했다. 당시 런던에서는 성냥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대파업 중이었다. 에멀라인 팽크허스트는 “사회운동가 애니 배전트 같은 뛰어난 여성들과 함께 열정적으로 파업에 참여했다”. 여성 노동자들의 작업 조건은 상당히 개선되었지만, 여성 참정권 법안과 관련해서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주류 남성 정치인들로부터 “아, 그 법안은 미래를 위한 것입니다”라는 답변만이 돌아왔다. 1893년 맨체스터로 돌아온 에멀라인 팽크허스트는 빈민구제위원회 일을 하면서 “여성 노동자의 삶의 조건”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들이 빈민구호소에 온 것은 그들의 잘못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저축할 만큼 많은 돈을 벌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었다. 영국 여성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미국 돈으로 치면 주당 2달러에 조금 못 미친다. (…) 게다가 대부분의 여성 노동자는 자신 말고도 다른 사람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 그러니 어떻게 저축을 할 수 있겠는가?” “여성에겐 상원도 하원도 없기에” 참정권 획득이 최우선 과제였다.

1898년 에멀라인 팽크허스트는 남편의 죽음을 겪었다. 가슴이 미어졌지만, 슬퍼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변호사였던) 남편이 갑작스럽게 죽었기 때문에” 우선 생계를 꾸려가야 했다. 그녀는 “빈민구제위원회의 직책을 사임하고, 곧바로 출생과 사망을 다루는 맨체스터의 등기소”에 취직한다. 인구조사 담당관으로 노동계급 지역의 출생자와 사망자를 수기(手記)로 기록하는 업무를 맡았다. 그녀는 “세상이 여성과 아이들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볼 때마다 새삼 충격을 받았다”. “열세 살 정도 된 여자아이가 자신이 낳은 사생아의 출생신고를 하러 등기소에 오곤” 했지만, 법은 그녀들의 편이 아니었다. “(사생아를 낳은) 아주 어린 엄마가 자신의 아이를 방치해서 죽게 만든 일이 발생”하자, “그 소녀는 살인죄로 재판을 받았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에멀라인 팽크허스트는 다시 여성 참정권 시위 현장으로 향한다. 그사이 딸들도 엄마와 함께 집회에 참여하는 동지로 훌쩍 자랐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투표권을 얻을 작정이에요.”

수감·단식 등 평생 바친 선각자
그의 사망 몇주 후 참정권 입법화
유학 중이던 나혜석에 큰 영향

안타깝게도 오랜 시간 “여성 참정권 운동은 막다른 골목에 부딪혀 있었다”. 에멀라인 팽크허스트는 1903년 여성사회정치연합(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WSPU)을 설립한다. 여성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의원들도 점차 우호적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하지만, 압도적인 다수의 의원들이 여성참정권법안에 찬성한다고 해도, “각료 열한 명이 적대적이면 법률로 제정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여성사회정치연합의 운동은 답보 상태였다. 결국 약 30명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이 1906년 봄 헨리 캠벨 배너먼 총리를 찾아가서 직접 법안의 필요성을 호소하기로 한다. 그들은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 앞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렸지만, 어서 떠나라는 말밖에 들을 수가 없었다. 대답을 듣기 위해 문을 세게 두드리자마자, “이 여자를 체포하시오”라는 명령이 이행되었다. 여성사회정치연합을 비롯한 모든 참정권 단체가 분노했다. 의원들도 상황을 파악하고, 200명이 “한꺼번에 정부가 발의한 여성참정권법안의 필요성을 총리에게 촉구하는 청원서를 보냈다”. 총리는 “의제에 공감하고 있으며, 의제가 옳다고 믿는 동시에, 여성들이 투표할 자격이 있다고 확신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자신의 입장과 달리 “내각 각료 몇 명이 여성 참정권 의제에 반대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참을성 있게 기다리라”고 말했다. 기득권의 벽은 높고도 견고했다.

그녀는 4년 동안 여성사회정치연합을 이끌면서 비폭력 노선을 철저하게 지켰다.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전략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시위 도중에 경찰들이 여성들을 때리고 “목을 잡고 얼굴이 새파래질 때까지 공원 울타리에 대고 찍어” 누르는 일이 벌어졌다. 에멀라인 팽크허스트도 “난투전 속에서 마루로 내동댕이쳐졌고, 심하게 다쳤다”. 악화일로를 걸었다. 1907년 2월12일 의회에서 낭독된 국왕 연설문에 여성참정권법안에 관한 내용은 여전히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에멀라인 팽크허스트는 “일어나라, 여성이여” “지금 당장” 두 슬로건을 외치면서 행진했다. 영국 정부는 여성사회정치연합이 총리에게 결의안을 전달하려 했다는 이유로 “130명의 여성을 감옥에 보냈다”.

여성사회정치연합 회원들은 유리창을 깨면서 정부에 저항했다. “상점 주인과 소매상과 다른 사람들이 겪은 손실에 대해서는 무척 유감”이었다. 많이 괴로웠다. 하지만, 비난과 처벌을 피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자신들의 절박함을 영국 사회에 호소하고자 했다. 에멀라인 팽크허스트는 “폭군이 남성들에게 노예의 속박을 강요할 때 남성들이 가만히 있으면 비겁하거나 불명예스러운 것이지만, 여성들이 가만히 순종하는 것은 존경할 만한 것이라고 남성들은 주장한다. 서프러제트는 이런 도덕의 이중 기준을 절대적으로 거부한다”고 포효하듯 연설했다. 에멀라인 팽크허스트는 또다시 수감되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미 해리스 당선자의 흰색 정장은
매 순간 전진한 여성 향한 경의
다음 세대의 ‘그들’을 기다릴 것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에멀라인 팽크허스트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영국의 승리를 위해 민간외교사절단의 일원으로 러시아로 향했다. 1918년에 1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영국은 승전국이 되었다. 누구도 그녀의 공헌을 부정할 수 없었다. 1918년, 영국 정부는 30세 이상의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 에멀라인 팽크허스트는 절반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았다. 성인 여성 모두가 참정권을 얻게 되는 날을 염원했다. 남녀 동일 임금과 평등한 결혼 제도 및 동등한 이혼 조건 등의 법안도 함께 주장했다. 하지만, 수감 생활과 단식 투쟁 등으로 오랫동안 건강이 좋지 않았던 에멀라인 팽크허스트는 1928년 6월에 70번째 생일을 맞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다. 영국 사회는 에멀라인 팽크허스트를 잃고 몇 주 후에 드디어 옳은 법안을 통과시켰다. 1928년, 21세 이상의 모든 영국 여성들은 참정권을 획득했다. 그리고 약 한 달 뒤, 식민지 조선의 화가이자 작가였던 나혜석이 런던에 도착한다. 여성사회정치연합의 회원은 이제 여성들의 권리를 위해 “저금”을 할 때라고 나혜석에게 조언을 건넸다.

여성이 권력과 돈을 거리낌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를 여성 운동의 선각자들은 반가워할 것이다. 2021년 1월에 미국 최초의 여성 부통령으로 취임하게 될 카말라 해리스 당선인(자메이카계인 해리스는 여러 인터뷰에서 자신의 이름을 ‘카말라’로 발음해야 한다고 말해 왔다)은 승리를 선언하는 축하 행사에서 흰색 정장을 입고 나타났다. 그녀는 영국과 미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이 입었던 흰색 옷으로 자신의 승리를 기념하며, 매 순간 전진하고 있는 여성들에게 경의와 찬사를 보냈다. 에멀라인 팽크허스트, 나혜석 그리고 카말라 해리스는 분명 다음 세대의 여성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장영은

[여성, 정치를 하다](15)‘투옥 불사’ 유리창 깨며 여성 참정권 투쟁…영국·조선 여성을 깨우다


성균관대학교에서 논문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비교문화연계전공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를 함께 썼고,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썼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야기하는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투해온 여성들의 생애를 복원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차근차근 모아 널리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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