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9 평양공동선언 5주년을 맞아 퇴임 후 처음 서울을 찾은 문재인 전 대통령은 19일 “안보와 경제는 보수 정부가 낫다는 조작된 신화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며 윤석열 정부를 직격했다. 안보는 물론 경제에서도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가 현 정부보다 더 잘했다며 윤 대통령과 여당의 전 정부 비판을 정면 반박한 것이다. 문 전 대통령이 직접 윤석열 정부 비판에 나서면서 여야 간 충돌은 더욱 격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문 전 대통령은 이날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9·19 평양공동선언 5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남북관계가 다시 파탄을 맞고 있는 지금도 남북군사합의는 남북 간의 군사충돌을 막는 최후의 안전핀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문 전 대통령은 “(9·19) 남북 군사합의를 폐기한다는 것은 최후의 안전핀을 제거하는 무책임한 일이 될 것”이라면서 현 정부의 대북 강경 기조를 비판했다. 9·19 군사합의 효력 정지를 추진하려는 현 정부에 일침을 가한 것이다.
9·19 군사합의는 2018년 9월19일 문재인 당시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서명한 평양공동선언의 부속합의서다. 지상과 해상, 공중 등에서 일체의 적대 행위를 전면 중지한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앞서 윤 대통령은 지난 1월 “북한이 다시 우리 영토를 침범하는 도발을 일으키면 9·19 군사합의 효력 정지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문 전 대통령은 “문재인 정부 동안 남북 간에 단 한 건도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희생된 사람도 없었다”면서 “역대 정부 중 단 한 건도 군사적 충돌이 없었던 정부는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뿐”이라고 했다. 이어 “언제 그런 날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파탄 난 지금의 남북 관계를 생각하면 안타깝고 착잡하기 짝이 없다”면서 얼어붙은 남북관계에 우려를 표했다.
그는 박정희 정부의 7·4 공동성명에서부터 문재인 정부의 9·19 평양공동선언까지 역대 정부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이어달리기’를 해왔다고 강조했다. 또 “구시대적이고 대결적인 냉전 이념이 우리 사회를 지배할 때 이어달리기는 장시간 중단되곤 했다”고 지적했다. 현 정부의 ‘구시대적 냉전 이념’ 때문에 한반도 평화를 위한 노력이 중단됐음을 비판한 것으로 풀이된다.
문 전 대통령은 “지나치게 진영외교에 치우쳐 외교의 균형을 잃게 되면, 안보와 경제에서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다”면서 한·미·일 협력에 치우쳐 북·중·러와의 대화에 소홀한 현 정부 외교 기조를 비판했다. 이어 “동맹을 최대한 중시하면서도 균형 있는 외교를 펼쳐나가는 섬세한 외교전략이 필요하다”면서 “평화가 경제인 만큼 우리 경제를 위해서라도 9·19 평양공동선언의 이어달리기가 하루빨리 이루어져야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실제로 우리 경제의 규모, 즉 국내총생산(GDP)이 세계 10위권 안으로 진입한 시기는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 때뿐”이라며 “지난해 우리 경제 규모는 세계 13위를 기록해 10위권에서 밀려났다”고 지적했다. 또 “1인당 국민소득을 보아도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 기간에 가장 큰 폭으로 증가했고, 노무현 정부는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문재인 정부는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를 열었다”면서 “문재인 정부 마지막 해인 2021년에 1인당 국민소득은 3만5000달러를 넘었는데, 지난해 3만2000달러 대로 떨어졌다”고 말했다.
문 전 대통령은 마지막으로 “이제는 문민정부 이후 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역대 정부의 안보 성적과 경제 성적을 비교해볼 수 있게 되었다”면서 “한 마디로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으로 이어진 진보 정부에서 안보 성적도, 경제 성적도 월등 좋았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안보는 보수 정부가 잘한다’,‘경제는 보수 정부가 낫다’는 조작된 신화에서 이제는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강조했다.
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서울을 찾은 것은 이날이 처음이다. 문 전 대통령은 이날 배우자 김정숙 여사와 나란히 9·19 선언 5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문 전 대통령은 짙은 파란 색의 타이를 매고 연단에 올라 한 손을 들어 인사했다. 이에 문희상 전 국회의장과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이 박수로 환영했다. 문 전 대통령은 약 19분간 인사말을 했고, 총 10번의 박수를 받았다. 문 전 대통령은 연단에서 내려와 박광온 민주당 원내대표와 가장 먼저 악수했다. 문 전 대통령은 행사가 끝난 뒤 감사원의 전 정부 통계 조작 감사와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체포동의안에 대한 입장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는 묵묵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