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과학은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왜 ‘실패는 죽음’이라는 법칙만 가르치나

2021.12.30 21:41 입력 2021.12.30 21:42 수정
이종필 교수

수능과 오징어게임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수능 문제 오류에 이의 제기하자
성취도 변별엔 문제없다는 평가원
결과주의만 앞세우는 것 안타까워

대한민국에서 수능시험은 국가적인 행사이다. 온 나라의 출근시간이 늦춰지고 비행기도 잠시 멈춘다. 경찰의 최우선 임무는 수험생 수송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이 시험 하나가 수험생의 향후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수능시험은 가히 ‘21세기의 과거시험’이다. 올해는 이 중요한 시험의 문항 하나로 세상 시끄러웠다.

나는 30여년 전 학력고사를 본 세대이다. 2022학년도 수능 생명과학Ⅱ 20번 문항을 처음 봤을 때, 만약 다시 내가 수능시험을 본다면 대학 문턱에도 가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랍게도 일부 수험생들은 이 문제의 오류를 발견해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이의신청을 했다. 문항의 설정에 따르면 특정 유전자형을 가진 개체의 수가 음수가 되는 상황이 발생하니 문항 자체가 잘못이라는 내용이었다. 평가원이 이의를 받아들이지 않자 수험생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결국 법정에서 승소해 문제의 오류가 인정되었고 전원 정답으로 처리되었다. 이 때문에 입시일정에도 차질이 생겼다.

수능이 국가지대사이다보니 문항과 정답을 둘러싼 다툼이 법정까지 갈 수도 있겠으나 그 과정을 돌아보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평가원이 자문을 받았다는 3개의 학회 중 2개는 평가원 간부들과 인적으로 겹쳐 공정성 시비를 불러일으켰다. 과학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더욱 아쉬웠던 점은 평가원이 표명한 입장이었다. 평가원은 이의신청에 대해, 문항조건이 완전하지 않아도 학업성취수준을 변별하는 데에 문제가 없다는 취지로 원래의 정답을 고수했다.

시험을 보고 점수를 매기는 과정은 궁극적으로 학생들을 변별하기 위함이겠지만 그렇게 학생들을 변별함으로써 우리가 추구하는 교육의 목표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남는다. 아주 단적으로 말하자면 과정이나 전체적인 맥락보다 결과만 평가하는 결과주의가 최고의 덕목으로 여겨지는 게 아닌가. 하필이면 문제가 된 것이 생명과학 문항이라는 게 내 마음에 더욱 걸렸다. 과학은 결과라기보다 과정이다. 과학이 역사상 가장 창의적이며 가장 성공적인 지식체계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만약 반대로 과학이 결과물에만 집착했다면, 새로운 실험적 증거들이 등장할 때마다 기존의 결과를 의심하고 심지어 전제를 부정하고 패러다임을 갈아엎는 혁명 따위는 감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매년 시월마다 왜 우리는 노벨 과학상을 못 받느냐고 한탄하기에 앞서 우리는 얼마나 학생들에게 과학의 본질을 잘 가르쳤는지 돌아봐야 한다.

17세기가 막 시작되었을 때 케플러는 브라헤가 남긴 방대한 천문관측 자료를 분석해 행성운동의 비밀을 밝혀냈다. 엄청난 시행착오를 겪으며 일일이 수작업으로 진행한 화성궤도의 계산에만 4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그 옛날 플라톤의 가르침에 따라 케플러는 화성의 공전궤도를 원으로 상정하고 브라헤의 관측 자료를 맞춰 나갔으나 약간의 오차를 피할 수 없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밀하지 못한 브라헤의 관측 결과를 탓했을 것이다. 그것이 가장 간단하면서도 마음이 편해지는 방편이다. 그러나 케플러는 행성의 위치에 따라 공전속도가 조금씩 달라진다는 점을 간파하고는 마침내 행성은 원운동을 하리라는 자신의 오랜 신념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케플러가 얻은 최종적인 결과는 타원궤도였다. 케플러는 브라헤와 사이가 좋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신념보다 그의 데이터를 더 신뢰했다. 오랜 세월의 실패 끝에 케플러는 원궤도라는 자신의 전제조건이 틀렸음을 깨달았고 마침내 행성운동의 법칙을 발견해 과학혁명으로 향하는 중요한 디딤돌을 놓을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도 잘못된 전제 자체를 타파한 결과물이었다. 19세기의 과학자들은 전기와 자기현상을 전자기현상으로 통합하면서 빛이 전자기 파동의 일종임을 알아내는 개가를 올렸다. 빛이 파동이라면 파동의 매개물이 있어야 한다. 과학자들은 그 매개물을 에테르라 불렀다. 에테르는 매우 단단하면서도 눈에는 보이지 않고 전 우주에 퍼져 있으면서도 행성의 운동을 방해하지도 않는 등 아주 기묘한 성질을 갖고 있었지만 당시 과학자들은 그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에테르를 검출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 어떤 실험적 결과도 나오지 않았지만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은 기발한 해결책을 제시해 이론과 실험의 간극을 메웠다. 26세의 아인슈타인은 에테르의 존재 자체를 상정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오랜 세월 암묵적으로 전제되었던 절대적인 시간과 공간의 지위도 박탈해 버렸다. 아인슈타인은 인간에게 익숙했던 개념과 전제조건을 과감하게 내던지고 자연의 심오한 원리, 즉 상대적인 운동에 따라 자연법칙이 변하지 않는다는 점과 광속의 독특한 성질에 주목했다. 혁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수험생들이 11월18일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수능을 치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수험생들이 11월18일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수능을 치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과학은 혁명과 전복의 학문이지만
구체제 버리지 않는 보수성도 강해
혁명을 위해선 수많은 실패가 필수

실수 하나가 치명적인 입시 교육
실패에서 배우는 법 익힐 수 없어
미래세대에게 무엇을 가르칠지
중요한 국가 어젠다로 고민해야

우리가 과학에서 가르쳐야 할 덕목은 최종결과로서의 지식이라기보다 그런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과정과 맥락이다. 과학은 혁명과 전복의 학문이다. 그러나 과학이 가장 혁명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변칙적인 현상이 한둘 나온다고 해서 곧바로 구체제를 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변칙을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면에서 과학자들은 지극히 보수적이다. 만약 구체제의 가능한 모든 수단이 무용지물로 끝난다면, 그리고 마침 유력한 대체재가 있다면, 과학자들은 미련 없이 혁명에 가담한다. 따라서 혁명의 탄생은 수많은 실패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무수히 많은 실패가 쌓여야 우리의 관습과 무의식을 지배하던 전제조건들까지 타파할 힘이 생긴다. 이런 까닭에 과학에서는 실패가 성공의 중요한 일부이다.

한국의 교육에서는 실패에서 배우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거꾸로 실패는 곧 죽음이라는 ‘오징어 게임’의 법칙만 가르친다. 지난 10월 한국형발사체 누리호가 발사됐을 때 대부분의 국내언론이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만으로 보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인생이 걸린’ 시험에서 전국의 수많은 학생들은 짧은 시간 안에 수많은 문제를 풀어야 한다. 그중에는 이른바 ‘킬러’ 문항들도 있다. 한순간만 삐끗해도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학생들에게 중요한 덕목은 실수하지 않는 법, 한순간의 실패도 없이 올바른 경로만 탐색해 최단시간 안에 정답에 이르는 능력이다. 대학 신입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수능 때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 킬러문항에 도전할 것인가, 이미 푼 문제들을 재검토할 것인가로 갈등을 겪는다고 한다. 그 성공과 실패의 하소연을 듣다보면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왜 우리는 학생들에게 충분히 생각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실패에서 배울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일까? 혹시나 어른들의 편의만을 위해서 학생들을 희생시키는 것은 아닐까? 킬러문항 몇 개로 학생들을 ‘변별’한다는 것이 수학과 과학의 본질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왜 우리는 그토록 변별력, 그것도 극소수 상위권의 변별력에 목을 매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상위권의 변별력을 높인다는 것은 결국 상위권 대학만의 이득에 부합할 뿐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과연 킬러문항 한두 개를 짧은 시간에 푸는 능력이 한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으로 적절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는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자유롭고 느슨한 분위기 속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할 수도 있다. 때로는 오랜 시간을 들여 꾸준하게 노력해야 해결되는 문제도 있다. 천하의 아인슈타인도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하는 데에 1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1882년에 착공한 스페인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은 아직도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1883년부터 건축 책임을 맡은 가우디는 1926년 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40년 넘게 성당 건축에 매달렸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증명되기까지 300년도 넘는 시간이 걸렸다. 과학의 역사를 돌아보면 한순간의 번득이는 아이디어가 역사책에 기록되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 우리는 어린 학생들의 다른 잠재적인 가능성들을 미리 거세하는 것일까? 아주 단편적인 기준 하나로만 한 인간의 능력과 잠재력을 평가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그런 시험 한 번에 ‘인생이 걸린’ 기막힌 현실은 또 얼마나 공정한가?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할 가장 중요한 기술 중 하나는 인공지능이다. 인공지능 기술은 한마디로 사물에 지능을 넣는 기술이다. 사물이 지능을 갖도록 하는 시대에 우리 교육은 학생들이 자신의 타고난 생물학적 지능조차 충분히 활용하도록 허용하지 않고 있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에서 코딩교육만 강화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한번 돌아봐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의 또 다른 키워드인 초연결성은 인간을 포함한 세상 만물이 네트워크로 연결된 상태이다. 여기서는 수직적인 위계질서보다 수평적이고 분권적인 소통과 협력이 중요하다. 극소수의 상위권 변별력을 최우선의 가치로 두고 그로부터 이른바 ‘서연고서성한…’의 줄 세우기에 익숙한 우리 풍토에서 소통과 협력의 리더십을 발휘해 융합과 혁신을 이끌어낼 인재를 길러낼 수 있을까? 이제는 더 이상 ‘나 혼자 잘하면 되는 시대’가 아니다. 나 혼자 킬러문항 잘 푸는 능력을 길러봐야 초연결과 초협력으로 뭉친 사회를 당할 재간이 없다. 세상은 이미 그렇게 바뀌고 있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4차 산업혁명이다. 이제는 우리도 ‘나 혼자’가 아니라 ‘다 함께’ 잘 사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내일이면 해가 바뀐다. 21세기하고도 벌써 20년도 훌쩍 넘었다. 마침 대선이 코앞이라 한국사회의 미래를 두고 갑론을박이 한참이다. 언제까지 우리는 지난 세기의 ‘한국형 천재’에만 매달려 죽음의 ‘오징어 게임’만 계속할 것인지, 우리는 과연 미래 세대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지, 중요한 국가 어젠다로 심각하게 고민했으면 좋겠다.

▶이종필 교수

[전문가의 세계 - 이종필의 과학자의 발상법](24)과학은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왜 ‘실패는 죽음’이라는 법칙만 가르치나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90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했으며 2001년 입자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연세대·고등과학원 등에서 연구원으로, 고려대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했다. 2016년부터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신의 입자를 찾아서> <대통령을 위한 과학 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 <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 등이 있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등을 우리글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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