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시절 긴 머리에 묵직한 스파이크 ‘무관의 야생마’
타 프로팀 제의 고사하며 고교·대학팀 지도자 생활
KB맨 ‘자긍심·한’ 안고 돌아와 “치장·수식 없는 배구”
이색적인 긴 머리에 에너지 넘치는 남자 운동선수들. 그라운드와 코트를 휘젓던 이들은 ‘야생마’ ‘삼손’이라는 별칭을 달곤 했다.
프로야구에선 LG의 레전드 이상훈이 원조 격이다. 축구에는 김주성 동아시아축구연맹 사무총장이 대표적인 긴 머리 스타였다. 배구 코트에는 이상렬 감독(54)이 긴 머리로 유명했다. 1989년 럭키금성 배구단에 입단해 1997년 LG화재에서 은퇴할 때까지 그는 긴 머리를 날리며 묵직한 스파이크를 뿜어내는 몸짓으로 배구 팬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그는 원 클럽맨이었지만 그 여정이 달콤하지만은 않았다. 삼성화재나 현대캐피탈 등 과거부터 우승경력을 쌓은 명문구단의 원 클럽맨이 아닌 우승과는 인연이 없던 ‘무관의 야생마’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모교 인창고, 경기대의 감독을 지낸 그는 지난달 20일 ‘친정팀’ KB손해보험 스타즈의 새 사령탑으로 선임됐다.
선수생활 때도 ‘언더 독’이었고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도 강팀의 러브콜보다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 감독직을 맡는 성향을 보였던 이상렬 감독의 배구는 그의 플레이스타일과 맞게 직선적이고 단순하다.
이 감독은 지난 7일 KB인재니움 수원 체육관에서 진행된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내 재임 2년 동안 팀이 얼마나 나아지겠느냐”며 지극히 현실절인 말을 거침없이 꺼내다가도 ‘언더 독’ 성향을 드러내며 내년 배구판을 흔들 야심을 내보였다. 프로구단 감독들 중 두 번째로 연장자가 될 때까지 프로팀과 연이 없었던 그의 ‘부초’ 같은 배구인생과 도무지 봄 배구와는 인연이 없어보이는 KB손해보험과의 만남은 그래서 더욱 극적이다.
그는 ‘KB맨’으로서의 자긍심과 한(恨)을 감독직 수락 이유로 밝혔다. “은퇴 후 지도자에 대한 꿈은 1%도 없었다”고 말한 그는 모교 인창고의 훈련을 돕던 인연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고교와 대학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프로에서의 러브콜도 많았지만 ‘꼭 KB에서 시작하겠다’는 마음에 다 고사했다.
그는 “삼성화재나 현대캐피탈 등 구단 출신 감독들이 모두 성공하는 분위기에서 ‘KB 출신도 할 수 있다’는 오기가 생긴 것도 사실”이라며 “어려운 시기에 있는 팀을 꼭 돕고 싶었다”고 말했다.
실제 KB손해보험은 LIG손해보험 시절이던 2010~2011시즌 이후 9시즌째 ‘봄 배구’ 소식이 없다. 남녀 통틀어서 가장 긴 ‘빙하기’다.
팀을 맡자마자 또 한 명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이경수 코치를 영입한 것 이외에는 선수단의 실질적인 큰 변화는 없다. 자유계약선수로 센터 박진우, 레프트 김정환 등을 잡아 전력누수는 막았지만 대표팀에서 백업세터로 활약 중인 4년차 황택의를 제외하고는 새 얼굴도 발굴하지 못한 실정이다.
하지만 이 감독은 동기부여를 강조했다. 그는 “일단 감독과 코치로 구단 선배가 온 것이 선수들에게는 더 잘하면 더 큰 선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은 될 것”이라며 “기존의 선수들을 잘 추스르고 다듬어서 성과를 내면서 구단으로 하여금 투자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역할도 맡겠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더 나아가 코트에서는 ‘미니멀 배구’, 코트 밖에서는 ‘소통’의 리더십을 강조했다.
이 감독은 “코트에서는 과도한 치장이나 수식이 없는 배구를 지향할 것이다. 훈련할 때도 코칭스태프나 감독에게 잘 보이려고 필요 없는 힘을 쓰지 않고 오로지 기량 발전에만 몰두하는 분위기를 만들 예정”이라면서 “감독 역시 외부의 여러 요인이 선수들이 실력 발휘를 하는 데 지장이 되지 않도록, 그저 물을 대는 ‘댐’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코트 밖에서도 간섭을 최소화하는 ‘미니멀리즘’은 계속된다.
이 감독은 “감독에게 눈치를 보지 않는 문화를 만들고 있다. 대학 감독을 오래 했기 때문에 요즘 선수들의 취향은 잘 알고 있다. 이제 선수단을 파악하는 분위기지만 선수들이 며칠 사이에 많이 편해진 것을 느낀다”며 “감독이 권위를 갖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이 감독의 다음 시즌은 조금 더 특별하다. 그의 큰딸 이유안이 2019~2020시즌 4라운드 1순위로 흥국생명 유니폼을 입으면서 ‘프로배구 부녀’가 됐다. “성장할 때 별로 해준 게 없는데 착하고 예쁘게 잘 커줬다”며 웃음을 보인 그는 “배구 이야기는 평소 안 한다. 노력을 많이 하니까.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고 가진 능력을 잘 발휘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프로감독으로 데뷔하는 그를 따라다니는 수식어 또한 있다. 과거 국가대표 코치 시절 박철우(한국전력)를 폭행했다는 혐의로 자격정지 중징계를 받았던 전력이다. 자연스럽게 프로로 돌아오자 그의 복귀를 비난하는 여론도 들끓고 있다. 이 감독은 “그 당시는 사고였다. 어찌 됐든 잘못한 일이며 후회스럽다”면서 “모든 사람에게 폭력적인 사람으로 생각됐다면 코트에 복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힘든 시절 응원해주던 많은 팬들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코트의 야생마는 이제 50대 중반의 나이에 남은 한을 풀기 위해 나선다. 그의 지도철학은 그의 플레이와도 닮아 있다. “팬을 위한 배구를 하겠다”는 이 감독의 약속은 이제 첫 시험대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