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나오미, “인터뷰를 거부할 권리”

2021.06.12 11:45

여자 테니스 세계랭킹 2위 오사카 나오미는 2021년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스포츠 스타다. 일본인 어머니와 아이티인 아버지를 뒀고 미국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머니를 따라 일본 국적으로 활동한다. 뉴욕타임스는 오사카를 “운동선수이자 엔터테이너, 대단한 사업가인 동시에 정치적 리더”라고 평가했다. 뉴욕타임스의 표현대로 오사카는 테니스 스타를 넘어 ‘시대의 아이콘’이다.

오사카는 지난해 9월 13일 US오픈 결승전에서 빅토리아 아자렌카를 꺾고 개인 두 번째 US오픈 여자단식 우승을 차지했다. 우승이 결정되는 순간, 오사카는 바닥에 누워 하늘을 쳐다봤다. 오사카는 “위대한 테니스 선배들이 우승하고 이렇게 하는 장면들을 봤다”며 “그들이 본 하늘을 나도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단지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는 세리머니만은 아니었다. 오사카의 세리머니는 인종차별에 희생당한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뜻이 담겼다.

오사카 나오미가 지난 5월 30일 프랑스 파리 롤랑 가로스 경기장에서 열린 프랑스 오픈 첫 라운드에서 승리한 뒤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오사카 나오미가 지난 5월 30일 프랑스 파리 롤랑 가로스 경기장에서 열린 프랑스 오픈 첫 라운드에서 승리한 뒤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인터뷰 거부와 기권

오사카는 US오픈 여자단식 7경기에서 매번 다른 마스크를 썼다. 검은 마스크에는 인종차별 희생자 이름을 적었다. 결승 때는 2014년 클리블랜드에서 백인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한 12세 소년 타미어 라이스의 이름을 적었다.

오사카는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당신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이었나’라는 질문에 “당신은 어떤 메시지를 받았나”라고 답한 뒤 “사람들이 (인종차별에 대해) 보다 많이 이야기하도록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앞서 8월 열린 웨스턴앤서던 오픈 준결승 때는 흑인들에 대한 경찰들의 과잉진압에 항의하는 뜻으로 “경기에 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오사카는 SNS를 통해 “나는 선수이기에 앞서, 흑인 여성이다”라고 적었다. 대회 주최측은 오사카의 뜻을 존중해 대회 일정을 하루 미뤘고, 오사카는 우승을 차지했다.

오사카는 ‘마이너리티’를 대표하는 투사다. 아시안과 아프리칸을 모두 대표하는 인종적 배경에다 차별적 행동에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이 팬과 동료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테니스 메이저대회 여자단식을 4차례나 우승했고, 필요한 목소리를 적절하게 내는 능력을 갖췄다. 정치적 의견도 서슴지 않는, 행동하는 스포츠 스타로서 ‘정치적 리더’의 면모 또한 갖췄다. 실력과 인기를 바탕으로 벌어들이는 수입도 만만치 않다. 오사카는 2020년 포브스가 선정하는 ‘올해의 스포츠 인물’로 뽑혔고, 지난해 벌어들인 수입이 3740만달러(약 420억원)나 되는, 전 세계 가장 돈을 많이 번 여성 스포츠 스타다. 올해 6월 5일 포브스가 발표한 자료에서는 6000만달러(약 670억원)를 벌어들인 것으로 계산됐다.

오사카는 지난 2월 열린 메이저대회 호주 오픈에서도 우승하며 승승장구를 이어갔다. 지난 5월에는 코로나19 팬데믹이 가라앉지 않는 가운데 도쿄올림픽 개최를 재고해야 한다는 소신 발언도 했다. 그런데 오사카는 프랑스 오픈 1회전을 통과한 뒤인 6월 1일(한국시간) 대회 기권을 선언했다. 대회 참가 전 “인터뷰를 거부하겠다”고 밝힌 것에 대한 후속 조치였다. 오사카는 대회를 앞두고 SNS를 통해 “기자회견에 참석하는 것은 선수 정신건강에 좋지 않을 수 있다”며 “예전에 여러 차례 답했던 질문이 또 나오고, 뭔가를 의심하는 듯한 질문을 받아야 한다. 그런 상황에 놓이고 싶지 않다”고 전했다. 패배 뒤 인터뷰에 대해서는 “넘어진 사람을 또 발로 차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오사카는 또 “특정 대회, 특정 기자가 싫어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다.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선을 그으며 ‘인터뷰 의무조항’에 반대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변화의 시발점

오사카는 실제로 1차전 승리 뒤 공식 기자회견에 참석하지 않았다. 프랑스 오픈 대회 조직위원회는 ‘인터뷰 의무조항’ 위반으로 1만5000달러의 벌금을 결정했고, 오사카는 2회전 불참과 함께 기권을 선언했다. 기권의 이유를 인스타그램에 적어 올렸다.

오사카는 이 글에서 “안녕하세요, 여러분. 며칠 전에 글을 적었을 때 이런 논란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프랑스 오픈이 잘 치러지고, 선수들이 경기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기권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혼동을 원하지 않았고 타이밍도 좋지 않았고, 보다 명확하게 설명했어야 했다”고 전했다. 2018년 US오픈 우승 이후 우울감과 싸워왔던 사실도 고백했다. 경기장에 들어설 때 줄곧 헤드폰을 쓰는 것도 불안감을 덜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오사카는 “내 행동으로 상처받았을 멋진 스포츠 라이터들에게도 사과한다”며 “사실 타고난 대중 연설가가 아니어서 그동안 전 세계 미디어 앞에 설 때마다 커다란 불안감이 몰려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답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상당한 스트레스였다”고 적었다. 오사카는 이어 잠정 은퇴를 언급했다. “잠깐 코트를 떠나 시간을 가져야겠다. 언젠가 코트로 돌아온 뒤에 투어 측과 선수와 미디어, 팬들에게 모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논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오사카 나오미는 2020년 US오픈 테니스대회에서 매 경기 인종차별로 숨진 흑인 피해자의 이름을 새긴 검정 마스크를 쓰고 출전했다. / NHK 캡처

오사카 나오미는 2020년 US오픈 테니스대회에서 매 경기 인종차별로 숨진 흑인 피해자의 이름을 새긴 검정 마스크를 쓰고 출전했다. / NHK 캡처

오사카의 기권 소식이 알려진 뒤 테니스는 물론 전 세계 스포츠 스타들의 격려와 위로가 이어졌다. 서리나 윌리엄스는 “나도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를 안아주고 싶다”고 전했고, 비너스 윌리엄스는 “너무 자랑스럽다. 몸조심하고 곧 다시 우승하라”고 밝혔다.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도 트위터에 “우리는 운동선수로서 스스로를 돌봐야 한다고 배웠다. 우리 모두 응원한다”고 전했다. NBA 스타 스테판 커리는 “당신이 이런 결정을 하면 안 되지만, 권력자들이 자기들을 보호하지 않을 때 높은 길을 가는 것은 정말 인상적”이라고 트위터에 적었다.

오사카의 ‘프랑스 오픈 선언’은 ‘인터뷰 의무조항’에 대한 문제 제기를 넘어서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다. 스포츠 산업의 구조 변화의 시발점으로 평가된다. 뉴욕타임스는 오사카의 글을 두고 ‘13문장만으로 스포츠 권력의 중심이 이동했음을 여실히 보여줬다’고 전했다. 물리학적으로 따지자면 ‘상변화’를 일으키는 ‘특이점’이 될 것이라고 여겨진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적으로 산업화의 길을 가기 시작한 ‘프로스포츠’는 3가지 주요 축을 중심으로 운영됐다. 대회와 리그를 운영하는 조직 또는 기구와 재정적 지원을 담당하는 스폰서(후원) 기업, 스포츠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승패(경기결과)’에 서사를 부여하는 미디어가 또 하나의 축이었다.

스포츠 산업이라는 재화 특성상 ‘조직’은 ‘독점’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다. 특정 종목에 재능있는 선수들을 한데 모아 경쟁을 시킬 수 있어야 흥행 산업으로서의 가치가 높아진다. 야구와 축구, 농구는 물론이고 테니스와 골프, 자동차 경주 등 거의 모든 프로스포츠는 리그가 독점적 지위를 갖는다. 글로벌 프로스포츠일수록 독점은 강해진다. 축구가 전 세계적 인기를 끄는 스포츠가 될 수 있었던 것은 FIFA라는 전 지구적 독점 운영 조직이 힘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리그는 독점적 지위를 바탕으로 스폰서를 끌어들인다. 프랑스 오픈의 메인 스폰서는 프랑스 금융그룹 BNP파리바가 오랫동안 맡아왔다. 아랍에미리츠 항공과 라코스테, 푸소, 롤렉스 등이 프리미엄 스폰서로 참가한다. 호주 오픈의 메인 스폰서는 기아 자동차다. 롤렉스와 아랍에미리츠 항공 등이 파트너로 참가한다. 경기 관련 거의 모든 화면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스폰서의 브랜드명은 상당한 광고 효과를 보장한다. 스포츠 경기 특성상 화면에 대한 집중도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미디어 역시 프로스포츠 산업의 중요한 참가자로 활약해왔다. TV 중계는 상당한 금액의 ‘중계권료’ 수입을 리그에 갖다주기도 하지만, 중계의 중요한 역할은 리그가 스폰서들을 노출시키는 매체로서의 역할이다. 방송 중계 화면은 정교하게 설계된 ‘미장센’을 통해 브랜드 노출을 극대화한다. 프로야구(특히 메이저리그)에서 홈런이 자주 날아가는 좌우측 외야 담장 근처의 광고판 가격은 상당히 높은데, 이는 짜릿한 홈런 하이라이트에 반복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수가 중심이 됐다

TV 중계 외에도 활자매체를 위한 ‘기자회견’이 열리는 것은 스포츠 이벤트의 ‘서사’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다. 승리와 패배의 장면을 넘어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끄집어내 엮음으로써 ‘그저 한경기’였을지도 모르는 경기를 ‘특별한 경기’로 만들고 역사의 일부로 구성했다. 최동원의 한국시리즈 ‘4승’은 ‘마, 함 해보입시더’라는 에피소드와 함께 팬들의 기억이 아닌 가슴에 남을 수 있었다.

오사카의 이번 선언은 (오사카의 의도와 전혀 관계 없이) 스포츠 산업의 축에서 ‘미디어’의 자리가 사라졌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인터뷰 의무조항’은 리그의 독점적 지위와 스폰서 노출 확대를 위한 과거의 유물이었다. 선수는 리그에 속해 있고, 리그의 규정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권위를 드러내는 장치다.

스포츠 스타는 과거처럼 승리와 패배로 소비되는 리그의 도구가 아니다. 스테판 커리를 비롯한 NBA 스타들은 코로나19 팬데믹 초기 때 감염병 예방을 위한 홍보대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축구선수 호날두는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2억9500만명을 넘는다. 인스타그램으로만 1년에 600억원을 넘게 벌 정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가졌다. 오사카의 선언과 이를 향한 동료, 팬들의 지지는 리그와 스폰서, 미디어가 아니라 이제 ‘선수’가 스포츠 산업의 가장 중요한 축이 됐다는 계시다.

PS. 그렇다면 남은 숙제는, ‘스포츠 기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아닌 ‘무엇을 할 수 있는가’다. 프랑스 오픈의 오사카 선언을 지지하면서도, 코로나19 팬데믹이 더해진 지금, 20년째 해오고 있는 이 일의 ‘레종데트르(프랑스어로 존재의 이유라는 뜻)’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에서 고민이 깊어진다. 오사카가 돌아왔을 때, 나(우리)는 무슨 질문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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