쉿! ‘비밀의 숲’ 가을 오면 닫힙니다…단 6개월 허락된 초록의 안락 제주 한남시험림

2024.08.17 06:00 입력 2024.08.17 06:02 수정
제주 | 글·사진 정은주 여행작가

비밀의 숲 제주 한남시험림

쉿! ‘비밀의 숲’ 가을 오면 닫힙니다…단 6개월 허락된 초록의 안락 제주 한남시험림

여전히 뜨거운 늦여름. 후텁지근한 공기에 숨이 턱턱 막혀오고, 더운 열기가 밤늦도록 잠을 못 자게 한다. 찜통 같은 더위에 지쳐 있던 차에 누군가 숲길 동행을 제안했다. 목적지는 제주 한남시험림. 봄 향기가 옅어지는 늦봄부터 단풍이 물드는 가을까지, 일 년에 절반만 문을 연다는 비밀스러운 숲이다. 아무 때나 쉽게 발을 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더욱 마음이 끌렸다. 주저 없이 짐을 꾸려 숲으로 향했다.

너를 만났다
나를 봤다

고요하고 호젓한, 나만의 숲길

서귀포시 남원읍 산간에 있는 한남시험림은 1922년 국유림에 지정되어 2002년부터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에서 관리하는 숲이다. 약 1200만㎡의 넓은 면적에 사려니오름과 넙거리오름을 비롯해 목재 생산지와 붉가시나무, 구상나무 조림지 등 다양한 산림 자원이 자리해 있다. 주요한 곳이다 보니 산불 같은 자연재해 예방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숲은 산불조심 기간을 제외한 매년 5월 중순부터 10월 말까지 약 6개월 동안만 개방된다. 또한 사전 예약한 탐방객만 출입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가고 싶을 때 언제든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는 숲이 아니기 때문에 탐방객 입장에선 다소 불편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한정된 시간에만 허락되는 특별한 공간이란 점은 오히려 숲이 가진 매력을 돋보이게 한다. 인적이 드물어 자연이 훼손되지 않고 잘 보전되어 있으며, 마치 나만 알고 있는 은밀한 장소를 소유한 기분. 이런 이유로 한남시험림에는 ‘비밀의 숲’이란 근사한 별칭이 붙어 있다. 인근 숲길이 사람들로 북적일 때에도 이곳은 고요하고 호젓한 분위기가 흐른다. 홀로 숲길을 걷다 보면 자연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때로는 넓은 숲을 혼자 독차지한 듯한 가슴 벅찬 순간도 경험하게 된다. ‘비밀의 숲’이라는 수식어가 결코 과하지 않다.

비밀의 숲에 입장하는 데 초대장은 필요 없다. 대신 먼저 탐방 안내소를 들러야 한다. 예약 확인 후 이름이 적힌 명찰을 받아 착용하고 탐방을 시작하면 된다. 탐방 코스는 A, B, C 세 구간으로 나뉘며 사려니오름까지 다녀오는 경우 넉넉히 3시간 이상 잡아야 한다. 오름 정상까지 계단이 많아 체력 소모가 크기 때문에 이 점을 고려해 코스를 짜는 것도 중요하다. 보통은 삼나무 전시림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이 일반적이며 약 2시간 소요된다. 숲을 방문한 날엔 사려니오름 입산이 통제되어 삼나무 전시림만 다녀오게 되었다. 덕분에 한결 가벼운 걸음으로 탐방길에 올랐다.

이 숲에 사람이 살았다더라

한여름의 숲은 짙푸른 초록빛으로 물들어 싱그럽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푸른 잎사귀들이 만드는 녹색의 향연이 끝없이 펼쳐지며 더위도 잊게 할 만큼 청량한 기분을 선사한다.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마음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천천히 걷기만 해도 몸속에 푸른 기운이 차오르는 듯하다. 검은 돌담에 낀 이끼마저 짙은 걸 보면 연간 3000㎜에 달하는 강우량과 높은 습도, 그리고 뜨거운 열기가 이런 기막힌 빛깔을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싶다.

돌담 너머로 보이는 표고버섯 재배지는 과거 이 숲에 사람들이 산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제주도 곳곳에서 표고버섯 재배가 시작되었는데, 한남시험림에도 이러한 터전들이 남아 있다. 광복 이후에도 많은 이들이 이 숲에서 화전을 일구거나 숯을 굽고, 버섯을 재배하며 삶을 이어갔다. 하지만 제주 4·3이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다. 당시 토벌대가 시행한 중산간 소개령으로 사람들이 강제로 떠나게 된 후 마을이 불에 타버려 더 이상 살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한순간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숲은 기억하고 있을까. 옛적 집이 있었던 빈터에는 돌담만 남아 있다. 아픈 역사를 위로하듯 나뭇잎 하나가 팔랑거리며 돌담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섬을 할퀴고 간 상처가 숲에도 남아 있음에 마음이 먹먹해진다.

오래된 삼나무 아래 노루가 뛰놀고

울창한 숲 사이 임도를 따라 걷던 길이 어느새 고요한 오솔길로 바뀌었다. 길 끝에는 한남시험림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삼나무 전시림이 자리하고 있다. 서너 명이 함께 팔을 벌려야 겨우 안을 수 있을 만큼 굵은 삼나무 고목들이 또 다른 숲을 이루고 있다.

1년에 약 6개월 동안만 개방되는 한남시험림의 끝, 인적 드문 삼나무 전시림에서는 때때로 출몰하는 노루와 맞닥뜨리는 행운을 만날 수도 있다.

1년에 약 6개월 동안만 개방되는 한남시험림의 끝, 인적 드문 삼나무 전시림에서는 때때로 출몰하는 노루와 맞닥뜨리는 행운을 만날 수도 있다.

하늘을 향해 뻗어난 가지들이 세월의 무게를 초월한 듯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있고, 높이 30m까지 자란 삼나무들은 숲속의 거인들처럼 위풍당당한 자태를 뽐낸다.

삼나무 전시림은 1930년대 일본에서 들여온 종자로 키운 묘목을 심어 조성했다.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삼나무숲으로 1850여그루의 아름드리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이 중에는 수령이 90년 이상 된 나무들도 수두룩하다. 삼나무 사이로 목재 테크가 깔려 있어 걷기 편하고, 눈 돌리는 곳마다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나무에 두껍게 자란 이끼와 버섯들이 마치 자연의 감초처럼 여기저기를 장식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한다. 앉아서 보든 서서 보든,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든 모든 곳이 황홀경이다. 데크 길은 그리 길지 않지만, 사진을 찍고 잠시 쉬면서 숲을 즐기다 보면 시간이 금세 흘러간다. 하지만 떠나려 해도 자꾸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쉬이 자리를 뜰 수가 없다. 되돌아가는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조금 먼 거리지만 사려니오름을 거쳐 가는 코스를 택했다. 비록 출입 통제로 오름은 오를 수 없지만 인적이 드문 길이라 노루가 자주 출몰한다고 했다. 혹시 노루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걸었다. 그때 길 중간에서 어린 노루 한 마리가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다가가도 그대로 서 있던 노루가 한 발 더 내딛자 숲속으로 휙 하니 달아나버렸다.

노루는 떠났지만 환희에 찬 여운이 길게 남아 한참을 근처에서 서성였다. 길을 따라 내려오며 오늘 하루의 기억을 고이 접어 마음속 책갈피에 꽂아 두었다.

차 한 잔 마시며 쉬어가기 좋은 수망다원 전경.

차 한 잔 마시며 쉬어가기 좋은 수망다원 전경.

한남시험림의 개방 기간은 이제 두 달 반밖에 남지 않았다. 아직 여름이지만 계절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가을이 오면 비밀의 숲은 다시 닫힐 것이다. 마음이 움직인다면 조금 서둘러야 한다. 우물쭈물하다간 내년을 기다려야 할지 모르니.

탐방 전 사전 예약은 필수

한남시험림은 5월16일부터 10월31일까지 개방하며 사전 예약제(1일 300명 이내)로 운영된다. 숲나들e 온라인 예약시스템(www.foresttrip.go.kr)을 통해 방문일 3일 전부터 신청할 수 있다. 월·화요일은 휴무. 입장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이며 오후 5시 전에는 숲을 나와야 한다. 숲해설 프로그램은 오전 9시, 오후 1시 하루 두 차례 진행된다. 대중교통으로 찾아가기 어렵기 때문에 승용차나 렌터카를 이용해야 한다. 숲 입구 아래쪽에 주차할 수 있는 빈터가 있으며 탐방 안내소까지 도보 2~3분 거리다. 공유 차량을 빌린다면 금호리조트 제주에 쏘카존이 있다. 한남시험림까지 약 15분 소요된다.

트레킹 후 즐기는 맛집 & 멋집

랑이식당의 밀푀유 만두전골.

랑이식당의 밀푀유 만두전골.

한남시험림 인근에는 밀푀유 만두전골로 유명한 랑이식당이 있다.

야채와 버섯, 만두를 듬뿍 넣은 전골냄비에 얇게 썬 쇠고기와 채소를 밀푀유처럼 한 겹씩 번갈아 가며 빼곡하게 채워 넣었다.

밀푀유는 땅콩 소스, 만두는 폰스 소스와 궁합이 잘 맞는다. 재료가 소진되면 문을 닫기 때문에 미리 전화하고 가야 한다.

차 한 잔 마시며 쉬어가려면 수망다원을 추천한다. 직접 재배한 유기농 녹차로 만든 다양한 음료를 즐길 수 있다.

눈앞에 펼쳐진 녹차밭 전망은 호사스러운 덤이다.

호젓한 복합문화공간 담소요의 정원.

호젓한 복합문화공간 담소요의 정원.

정원과 문학이 결합된 복합문화공간인 담소요도 가볼 만하다. 오래 묵은 귤나무를 걷어내 여백을 둔 정원으로 꾸민 내공이 놀랍다.

카페에서 커피와 차, 후무스와 피타 브레드로 구성된 브런치 박스를 판매한다. 책과 문구류, 정원용품 등을 콘셉트에 맞춰 큐레이션한 편집숍도 인상적이다. 한 권의 책을 두고 여럿이 필사를 이어가는 흥미로운 공간도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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