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터와 오일장이 있던 규암마을
부여를 찾는 여행자들은 대부분 부여읍에 머문다. 국립부여박물관, 정림사지, 궁남지 등 이름난 백제의 유산이 모두 부여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선을 돌려 부여읍을 둘러싼 백마강을 건너면 삼국시대와 같이 먼 과거가 아닌 근현대의 과거를 체험할 수 있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1960년대 백제교가 생기기 전까지 규암마을은 나루터와 오일장을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이 드나들던 부여의 중심지였다. 다리 건설로 나루터가 쓰임을 잃자 200호가 넘던 마을은 쇠락해갔다.
규암마을이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한 것은 젊은 공예가들이 마을로 모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과거 나루터와 오일장의 흔적 위에 공예가들이 모여 레트로 여행지로 재탄생했다. 골목마다 옛 건물을 그대로 살린 공방, 책방, 갤러리, 편집숍, 카페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원래 살던 동네인 양 천천히 걸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가져보자.
책방과 서고의 세간살이
부여군은 규암마을을 ‘123사비공예마을’로 브랜드화하여 창작센터, 아트큐브센터, 레지던스를 운영하고 마을 내 12개 공방을 지원하고 있다. 매월 공예품 전시와 체험을 진행하는 규암장터를 열고, 백마강 야행, 팝업스토어, 규암 공예 페스타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123사비레지던스’는 청년공예인과 여행자가 함께 어울리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주로 외국인이나 가족 단위 장기 투숙객이 머물고 있다. 이외에도 공방을 개조해 에어비앤비로 활용 중인 ‘청명’, 한옥 스테이 ‘작은한옥’ 등이 숙박을 위한 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여행의 시작은 ‘123사비아트큐브&전망대’이다. 주민과 여행자, 공예인들의 소통 공간으로 특정 기간에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것은 물론 플리마켓과 작가들의 원데이 클래스가 열린다. 전시 기간이 아니라도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을 보며 잠시 ‘물멍’을 즐길 수 있어서 좋다.
123사비아트큐브를 나와 건너편을 바라보면 나지막한 상가들이 눈에 띈다. 골목 안은 현대적인 건물과 옛 건물들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부여서고’다. 이름만 봐서는 서점인가 싶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다양한 제품이 눈에 들어온다.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소품 외에도 베트남에서 만든 소쿠리와 가방도 있고 염색 장인인 주인이 직접 색을 입힌 작품도 보인다. 여러 문화의 물건들이 서고의 책처럼 모이는 곳이라는 설명을 들으니 책이 없어도 이상하지 않다.
부여서고와 지붕을 맞대고 있는 옆집이 진짜 서점이다. 규암마을에서 가장 먼저 생긴 문화공간인 ‘책방세간’은 낙후된 마을이 새롭게 호흡할 수 있도록 포문을 연 곳이다. 책방세간의 주인이자 공예가인 박경아 대표는 서울 인사동·북촌·서촌, 파주 헤이리마을 등에서 아트숍을 운영한 경험을 바탕으로 비싼 임대료 걱정 없이 꿈을 펼칠 수 있는 규암마을을 선택했다. 박 대표는 책방을 시작으로 전통문화와 공예라는 문화 콘텐츠로 마을을 다시 살리는 ‘자온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 결과 오래된 집을 개조해 카페(수월옥), 음식점(자온양조장), 공연장(이안당), 숙박시설(작은한옥)이 탄생했다. 80년 된 담배가게 건물을 재해석한 책방세간은 당시 가게 주인 이름이 새겨진 문패와 금고, 진열장 등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특히 담뱃갑 속 은박지를 형상화한 벽면이 영롱하게 빛나며 오래된 물건들과 책을 비춘다. 안쪽에는 책을 읽고 차도 마실 수 있는 작은 방이 마련돼 있다. 손때 묻은 세간살이가 놓여 있어 흑백사진 속 외할머니가 불쑥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양조장과 한옥의 매끄러운 이질감
부여서고와 책방세간이 있는 골목에는 옛 건물을 사용하는 곳이 많다. 프랜차이즈가 점령한 도시의 점포들은 어딜 가나 비슷한데 이곳에서 만나는 가게들은 모양도 색깔도 제각각이다. 홀린 듯 마을 안으로 계속 들어가니 외형은 오래되었으나 관리가 잘된 건물에 ‘자온양조장’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머뭇거리는 몸짓에 직원이 나와서 양조장이 아닌 음식점이니 편하게 구경하라고 안으로 이끈다. 입구 쪽 테이블에는 과거 양조장의 정체성을 보여주듯 다양한 브랜드와 모양의 술병이 전시되어 있고 내부는 자개장, 문갑 등 고가구와 소품들로 꾸며져 있다. 분위기는 ‘레트로’하지만 주메뉴인 피자, 파스타 등과 이질감 없이 어울린다.
다리 놓인 뒤로 쇠락하던 나루터
젊은 작가들 모여 ‘공예마을’ 형성
오랫동안 골목골목 지키던 건물들
카페·음식점·책방 등으로 재탄생
겉모습만 보존·전시된 ‘박제’ 아닌
청년·주민 활기로 살아 숨쉬는 곳
과거 자온양조장은 자온과실주와 자온약주로 유명했다고 한다. 뒷마당에는 술 만들 때 사용했던 우물이 있는데 지금도 물이 나오고 있다. 우물 옆 불을 피우던 굴뚝과 술을 내리던 건물도 옛 모습 그대로다. 곧 이 물로 다시 술을 만들 예정이다. 술을 만드는 물이라면 맛이 얼마나 좋을지, 그 물로 만드는 술은 또 얼마나 깊을지, 다음 부여 여행은 이미 취할 예정이다.
마당과 이어지는 언덕 옆 오래된 한옥이 백년고택 이안당이다. 100년이 넘은 이안당은 일본 건축양식을 활용한 ㄱ자 모양의 한옥이다. 과거 자온양조장의 주인댁이던 이안당은 긴 세월이 믿기지 않을 만큼 늠름한 자태를 뽐낸다. 한옥 내부와 너른 마당에서는 지역 축제가 열리기도 하고 가수들이 공연을 하기도 한다. 방문한 날도 서울 모 대학 관계자들이 포럼을 진행하느라 분주했고, 활기가 한옥을 가득 채웠다.
공예로 누리는 소소한 즐거움
이안당을 나와 오르막과 내리막, 포장과 비포장길을 번갈아 걸으며 마을을 크게 한 바퀴 돈다. 큰길로 나와 아트센터 방향으로 걷다 보면 옛 농협창고를 개조한 건물 두 동을 만날 수 있다. 청년창고 옆 허름한 단층 건물이 규암마을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 ‘수월옥’이다. 1955년 지어진 건물의 외형을 살려 만든 카페인데, 수월옥이라는 이름도 과거 술을 팔던 요정 이름을 가져온 것이다. 좌식 테이블 앞에는 방석이 깔려 있으며 창호 문도 아무렇지 않게 달려 있다. 낡은 모습에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이지만, 직접 로스팅한 커피의 맛과 향이 오래된 공간과 잘 어우러진다.
‘123사비창작센터’는 청년공예가와 지역주민의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공간으로 입주공예가를 위한 스튜디오, 세미나실, 촬영 스튜디오, 공동 작업 공간인 메이커스페이스를 갖추고 있다. 또 다른 건물은 청년 창업가들의 창업 활동을 돕는 ‘부여창고’이다. 2018년부터 꾸준히 청년 창업가들을 배출하는 곳으로 1층에는 카페가 있어 방문자들도 들러갈 수 있다.
수월옥을 지난 골목에 ‘나무모리 공방’과 ‘북토이’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나무모리 공방은 가구를 제작 판매하고 목공키트를 활용한 다양한 목공체험과 아로마오일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캐릭터 인형 만들기 같은 책 활동을 진행하는 북토이는 동네 어르신들도 자주 찾는다. 이외에도 골목마다 염색, 퀼트, 손뜨개, 도자기, 생활도구 제작 등 다양한 공방이 있으니 체험을 원한다면 미리 위치와 시간표 등을 확인하는 것이 좋다.
많은 레트로 마을들이 유행처럼 생겼다 사라지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단지 옛것을 보존하고 전시하는 것만으로는 추억을 박제한 공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규암마을은 옛것의 뼈대 위에 공예를 더해 현재에도 유효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 온고지신 문화마을, 규암마을의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이유다.
>> 규암마을에 간다면
부여터미널에서 규암마을까지 걸어서는 40분, 버스로는 15분 정도 걸린다. 차로 간다면 123아트큐브&전망대 뒤편 주차장에 주차 후 마을로 들어가면 된다. 단, 내비게이션에서 ‘123아트큐브’만 검색할 경우 강둑으로 난 산책길을 안내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거의 다 왔는데 강이 유난히 가깝게 느껴진다면 500m 이상 후진하는 불상사를 겪을 수 있다. 공예체험은 가능한 날짜와 시간을 사전에 확인한 후 방문하자. 공예 프로그램과 장비 교육, 공방에 대한 정보는 123사비공예마을 홈페이지(www.buyeo.go.kr/html/123sabi/)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