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김옥균 피살

2009.03.27 17:55

일제의 본질 간과 ‘悲運’

1894년 3월28일 오후 3시께 중국 상하이 둥허양행(東和洋行) 2층에서 김옥균이 홍종우가 쏜 세 발의 총탄에 피살됐다. 43세. 리홍장을 설득해 조선 독립을 이루겠다는 꿈을 품고 상하이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이었다.

[어제의 오늘]1894년 김옥균 피살

‘3일 천하’로 회자되는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1851~1894)은 ‘시대의 풍운아’였다. 명문 안동 김씨 출신으로 22세 때 알성시에 장원급제한 뒤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김옥균은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자 개화사상가였던 박규수 문하에서 홍영식·서광범·박영효·서재필 등 명문가 자제들과 교류하면서 근대사상에 눈떴다. 충의계(忠義契)라는 비밀결사를 통해 세력을 규합했다.

하지만 개화파의 급진적인 개혁에 위기감을 느낀 보수세력들은 이들을 중앙 정계에서 밀어냈다. 이에 김옥균 등 개화파가 감행한 것이 1884년 12월4일의 갑신정변이었다. 김옥균 등은 조선이 자주적인 근대국가로 나가기 위해서는 청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일본이 조선을 도울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러나 거사는 3일 만에 막을 내렸다. 청군이 반격해왔고 지원을 약속했던 일본 측도 배신했다. 홍영식이 피살됐고 김옥균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후 김옥균은 10년간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망명 중에도 일본의 재야 인사 등과 만나 민씨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그는 조선과 중국, 심지어 일본 정부에도 골칫덩이였다. 수차례의 암살 시도가 이어졌고 결국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의 총에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시신은 조선에 인계돼 능지처참 형을 받았다.

김옥균은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해인 1910년 충달공(忠達公)이라는 시호가 추증됐고 이후 일제와 친일파는 그를 동아시아의 선각자, 뜻을 이루지 못한 비운의 혁명가로 상징화했다. 김옥균은 한·중·일 3국이 힘을 합쳐 서구 열강의 침입에 맞서자는 ‘삼화(三和)주의’를 주창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일본의 침략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

일본 도쿄 아오야마 공원묘지의 외국인 묘역에는 김옥균의 머리털을 묻은 무덤이 있다. 비석에는 유길준이 쓴 비명이 새겨져 있다. “비상한 재주를 갖고, 비상한 시대를 만나, 비상한 공도 세우지 못하고, 비상하게 죽어간, 하늘나라의 김옥균공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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