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애초 고위급회담 꺼려… 남 “김양건이 결자해지”에 북 “사과하라”

2013.06.13 06:00 입력 2013.06.13 06:03 수정

남북당국회담 무산 경위 재구성

남북당국회담이 수석대표급 논란으로 전격 무산되면서 그를 둘러싼 온갖 관측과 시나리오가 나오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다 성사된 남북회담을, 그것도 개최 전날 깼느냐는 궁금증이 제기되고 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청와대가 이야기의 중심이다. 실무 부처 생각과 달리 ‘장관급 회담’으로 격상시킨 것도, 김양건 북한 노동당 대남비서 및 통일전선부장을 콕 찍은 ‘격 맞추기’까지 모두 청와대의 결정인 것으로 전해졌다. 또 정부는 실무접촉에서 이미 북측이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서기국장을 대표로 내보낼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북한의 실무접촉 역제안과 개성·판문점을 두고 오간 남북의 기싸움,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진 지난 9일 실무접촉의 진통 등 안갯속이었던 무산의 과정과 배경들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 청와대, 북 의도와 상관없이 ‘장관급회담’ 주도
강지영 카드 예상… 명단교환 순간 결렬 분위기

<b>허탈한 ‘개성공단’</b> 12일 서울 마포구 성산동 금강산기업인협의회 사무실에서 한 기업인이 허탈한 표정으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 서성일 기자

허탈한 ‘개성공단’ 12일 서울 마포구 성산동 금강산기업인협의회 사무실에서 한 기업인이 허탈한 표정으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 서성일 기자

(1) ‘장관급 회담’ 결정 등 청와대가 회담 주도

당초 남북 간 회담을 ‘장관급 회담’으로 열자고 한 것은 청와대인 것으로 알려졌다. 회담에 정통한 한 당국자는 “정부는 북한이 (지난 6일) 당국 간 회담 수용 의사를 밝혔을 때 차관급 정도를 최대치라고 생각했으나 청와대에서 장관급 회담으로 준비하라고 했다”고 전했다. 북한이 언급한 당국 간 회담 의제가 포괄적이기 때문에 현안을 책임 있게 다룰 당국자가 나서야 한다는 정부 논리도 이때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이튿날 북한의 실무접촉 개성 개최 제안에 장소를 판문점으로 바꾼 전통문을 류길재 통일부 장관 명의로 김 통전부장에게 보낸 것도 이런 급 맞추기의 연장이다. 실무접촉에서도 남측 대표단은 지난 3월8일 김 부장이 개성공단을 찾은 직후 근로자 전원 철수 방침을 발표한 만큼 김 부장이 결자해지 차원에서 나서 문제를 풀자고 북측에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성혜 북측 수석대표는 처음에는 그냥 듣고 돌아갔다가 나중에 “당장 사과하라”고 화를 낸 것으로 전해졌다.

통일부 내에서도 남북 간 한반도 정책을 총괄하는 이른바 ‘통(통일부)-통(통일전선부) 라인’으로 두 기관의 격을 맞추는 것은 오랜 숙원이었다. 정부 관계자는 “과거 장관급 회담이라고 하긴 했지만 북측 수석대표급은 내각참사였다”며 “직함만 있지 재량권이 없고 급이 낮았던 것은 사실이라 내부적으로도 회담 대표의 격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은 죽 있어왔다”고 했다.

(2) 당국회담으로 회담 이름을 바꾼 이면에 숨은 속셈들

남북 간 이견이 노정되는 가운데서도 양측은 회담 명칭을 ‘남북당국회담’으로 바꾸는 데는 동의했다. ‘장관급 회담’이란 구체적 격을 박은 명칭에서 다소 모호하게 회담 성격을 변화시킨 것이다. 그 배경엔 남북의 각기 다른 속내가 깔려 있다.

남측의 경우 대표의 급이 문제였다. 통일부 당국자는 “장관급이 대표로 나오지 못한다면 회담의 명칭을 고위당국회담으로 하자고 제안했지만 북한은 그것도 꺼렸다”고 했다. ‘류길재-김양건 회담’이 무산된 이상 ‘격’을 감안하면 더 이상 ‘장관급 회담’을 못박기 힘들어진 것이다.

‘북한이 먼저 장관급 회담 말고 새로운 명칭으로 해보자고 제안했다’는 정부 설명에서 보듯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회담 관계자는 “북한은 원래 장관급 회담이나 고위급 회담 이런 명칭을 부담스러워했다”며 “북한은 경제·사회적인 쪽으로 접근해서 남북 문제를 풀고 싶어하는데, 급이 격상되면 정치·군사적인 문제를 거론할 수밖에 없어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처음부터 북한은 ‘핵 문제’가 부각될 수 있는 고위 수준의 회담을 꺼렸다는 풀이도 가능한 대목이다.

<b>뒤숭숭한 현대아산</b> 남북당국회담이 무산된 가운데 1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연지동 현대아산에서 한 직원이 통화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뒤숭숭한 현대아산 남북당국회담이 무산된 가운데 1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연지동 현대아산에서 한 직원이 통화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3) 남측은 ‘강지영 카드’를 예상했다

북한은 이미 실무접촉에서 당국회담 대표로 강지영 조평통 서기국 국장을 앞세울 것이라는 점을 사실상 통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우리가 애초 원한 것은 류길재 장관과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었지만 북측에서 처음부터 김양건은 안된다고 했다”며 “ ‘안된다’ 정도에서 끝난 게 아니라 조평통 서기국장을 내보내겠다고 이야기를 한 모양”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통일부는 ‘류길재-김양건’ 수석대표가 성사되기 어렵다면 강 국장이 수석대표 1번이 될 것이라는 기류를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측이 북한 명단을 확인하지 않은 채 김남식 통일부 차관을 회담 수석대표로 결정한 것도 이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 통일부 당국자는 “우리도 실무접촉 이후 서기국장을 내보낼 것 같다고 예상했다”며 “그에 상응하는 인사를 내보내겠다고 통보했다”고 말했다.

오히려 차관급 파트너로는 북측 수석대표로 강 국장 카드를 긍정평가하는 기류도 통일부에선 흘렀다. 그동안 북한이 장관급 회담에서 남측 장관의 카운터 파트로 내세웠던 수석대표들의 급에 비하면 “성의를 보인 것으로 볼 수 있다”(정부 관계자)는 말도 들렸다.

(4) 명단 교환 순간 이미 회담은 결렬

통일부는 명단이 교환된 직후인 11일 오후 1시 사실상 회담이 무산된 것으로 판단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강지영 서기국장이 나올 것을 예상하고 이미 김남식 차관을 수석대표로 한 명단을 만들었기 때문에 강 국장을 ‘상급(相級)’, 즉 장관급이라 주장하는 북측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다는 이야기다.

“북한은 명단을 보고 거의 바로 문제제기를 했고 대표단 파견을 보류하겠다는 식으로 나왔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이후 오후 7시5분까지 수차례 연락관 접촉을 하는 동안 남측은 격을 맞춰야 한다고 완강히 요구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북한은 계속 왜 차관급이냐고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는 차관이 현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수석대표라고 설명했다”고 말했다.

양측은 평행선을 달렸고 결국 북한은 이를 “엄중한 도발로 간주하고 대표단 파견을 보류한다”고 통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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