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노무사, 후회로 쓴 ‘일베 반성문’

2018.03.20 23:20 입력 2018.03.20 23:35 수정

‘폐쇄’ 국민청원 동참 윤수황씨

4년 전 TV서 ‘일밍아웃’ 이후 세월호 조롱글 보며 믿음 깨져

“논쟁 사라지고 폭력만 남은 일베…합리적 보수까지 욕먹게 해”

한때 공개적으로 일베 회원임을 밝혔던 윤수황 노무사가 19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베 폐쇄를 주장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한때 공개적으로 일베 회원임을 밝혔던 윤수황 노무사가 19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베 폐쇄를 주장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이 이야기는 제가 지난 4년간 후회와 자책을 하며 써 내려간 반성문입니다. 제 발언으로 피해를 입었을 모든 분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극우 성향 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회원이자 현직 노무사인 윤수황씨(32)는 사과부터 했다. 2013년부터 자신이 일베 회원임을 공개하며 누구보다 일베를 옹호해온 그였다. 그런 윤씨가 ‘일베 폐쇄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지난 5년간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윤씨는 지난 19일 두 시간 남짓 진행된 경향신문과의 인터뷰 내내 “내가 잘못했다” “내 행동에 어떻게든 책임을 지고 싶다”는 말을 수차례 반복했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이냐’고 묻는 질문엔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 모든 일은 4년 전 출연했던 공중파 방송에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윤씨는 2014년 한 공중파 시사프로그램에 출연해 일베를 옹호하는 인터뷰를 했다. 해당 프로그램의 제작 프로듀서가 낸 인터뷰 대상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일베 게시판에서 보고 윤씨가 자원한 것이었다. 그는 이 인터뷰에서 자신의 직업, 이름, 나이, 얼굴 등을 모두 공개했다. ‘일밍아웃’(일베 사용자임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을 한 셈이다.

윤씨는 인터뷰에 나선 이유에 대해 “노무사로서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하고 있었고, 스스로 건전한 비판의식을 가졌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시 프로그램의 주제는 ‘일베와 행게이(일베 게시판 이용자를 줄인 말)는 어디에나 있고, 아무 데도 없다’였다.

윤씨는 이 프로그램에서 “일베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공간”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누구든 참여해 수평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한 곳”이라고도 말했다. 정권에 비판적인 글을 올리는 데 자유로운 게시판이라는 점을 설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믿음은 인터뷰 일주일 뒤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 부서졌다고 윤씨는 말했다.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정말 운명의 장난 같았다. 제가 인터뷰를 한 일주일 뒤에 세월호 사고가 터졌다. 그 후 일베에서 벌어진,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일들을 생각하면…”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윤씨는 일베가 세월호 참사를 기점으로 변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세월호 사건 이전의 일베는 보편적 복지나 2008년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촛불집회 등에 대해 부정적인 보수 성향의 사람들이 논쟁하는 공간이었다”고 말했다. 윤씨는 “당시에도 젊은 보수층이 자유롭게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곳은 인터넷 공간밖에 없었는데 일베에 가면 시장경제를 무시하는 주장들을 마음껏 비판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 일베에는 합리적인 보수 회원의 글들은 모습을 감추고 극우만 남은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세월호 희생자를 조롱하고 유가족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일부 회원들은 오프라인에서 만나 세월호 사건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이는 유족들 앞에서 피자와 치킨을 시켜 먹는 패륜을 저질렀다.

윤씨가 처음 일베를 접하게 된 것은 2013년이다. 처음에는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에 접속해 게시글들을 읽던 윤씨는 디시인사이드의 심의 기준 때문에 볼 수 없는 글들이 일베에는 게재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윤씨는 틈틈이 일베에 접속해 그곳에 올라오는 글들을 읽었다. 

윤씨에게 일베는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포털사이트와 같았다. 그는 “사람들이 포털사이트를 통해 기사나 글들을 읽고 정보를 얻듯이 나도 일베에 올라오는 기사나 글들을 통해 정보를 얻었다”며 “나처럼 보수 성향의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정치글도 있었고 유머글들도 많아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젊은 보수들이 일베에서 건전한 논쟁을 하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고 강조했다.

윤씨가 일베 회원이 된 것은 ‘반발심’ 때문이라고도 했다. 1980년대 중반에 태어나 199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그는 “물질적으로도 굉장히 풍요롭고 표현의 자유도 보장되는 학창 시절을 보낸 세대”였지만 그가 20대가 되자 취업난, 비정규직 문제 등 각종 사회문제들이 쏟아져 나왔다. 윤씨 역시 이러한 문제들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는 힘든 20대를 보내며 ‘지난 진보정권 10년 동안 대체 무엇을 했길래 이렇게 살기가 힘든가’라는 반발심이 생겼다고 했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진 진보정권이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았다는 비판의식에 그는 스스로 보수가 됐다. 노무사로서 개인사업을 하게 된 2012년부터는 ‘경제 우선주의’를 내세운 보수정권에 더욱 끌릴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윤씨는 “방송 인터뷰를 한 지 4년이나 지났고 주변 사람들 중에도 내가 방송에서 일베를 옹호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과거 잘못을 사과하는 인터뷰를 하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게 더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다”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왜 이런 고백을 하느냐’고 물어보자 윤씨는 “죄책감 때문”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누군가 내가 한 인터뷰를 보고 일베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긍정적인 공간’으로 잘못 인식하게 됐을까봐 두렵다”며 “사회적 공공재인 공중파 방송에 나와 일베를 옹호한 내 발언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자신이 행한 잘못을 고백함으로써 대한민국의 평범한 보수들이 한 번이라도 일베에 대해 돌아보고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장을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윤씨가 공개 사과를 결심한 이유에는 지난 1월25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 사이트 폐쇄를 요청합니다’라는 게시글도 영향을 미쳤다. 이날 오후 현재 이 청원글은 23만5167명의 지지를 받으며 청와대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윤씨는 “나처럼 과거에 일베를 옹호했던 사람도 이제는 일베가 사회적 해악이라는 점에 동의하고 폐지에 찬성한다”며 “청와대가 이러한 사실까지 고려해서 답변을 내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윤씨는 정부가 일베를 폐쇄하지 못한다면 청소년 유해 사이트로라도 지정해줄 것을 당부했다. 그는 “일베 사이트가 본질적으로 유머 사이트라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일베에는 어떤 글을 올려도 건전한 논쟁은 되지 않고 ‘웃자고 하는 소리인데 심각하게 보지 말자’는 식으로 넘어간다”고 지적했다. 청소년이 합리적인 논의의 과정보다 무슨 말을 해도 괜찮다는 것부터 배워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또 일베에 올라오는 각종 음란 게시물은 청소년들에게 왜곡된 성관념을 조장하게 한다며 이는 반드시 제재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적 성향과 관계없이 일베 자체가 가지는 폭력성과 선정성도 지적했다. 일베의 인기글이 되기 위해서는 ‘일베로’라는 이용자들의 추천을 받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 보다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글들을 경쟁하듯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과거 일베를 옹호한 발언은 사과했지만 윤씨는 여전히 보수적 가치에 대한 신념도 지켜가고 있다고 했다. 그는 “요즘 일베에는 보수가 아닌 극우 혹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맹목적 추종자들만 넘쳐난다”며 “일베 때문에 합리적 보수도 일반 대중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상황이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일베에서 더 이상 합리적 사고가 불가능하다는 증거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올리는 글’들을 언급했다. 일베가 보수가 아닌 박 전 대통령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의 성토장이 됐다는 것이다.

윤씨는 “20~30대 보수들은 어디서든 한 번쯤 ‘혹시 일베하는 사람인가’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다”며 “청년 보수들에게 붙는 일베 딱지가 무서워서 보수를 자칭하는 세대가 없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합리적인 보수들이 모여 토론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열어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가 말하는 새로운 공간은 일베처럼 온라인에서만 활동하는 것이 아닌 오프라인에서도 보수적 가치를 떳떳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했다. 윤씨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며 “20~30대 청년 보수들이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진보적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토론을 할 수 있는 장이 열리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 4년 동안 너무 힘들었다고 말하는 윤씨에게 ‘이 인터뷰가 나가면 일베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공격받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오히려 마음이 후련하다”며 “지난 4년간 마음 한쪽에 빚을 지고 산 것 같았다”고 말했다. 또 “자기 때문에 노무사라는 자신의 직업까지 비하를 받았다”며 “다시 한번 내 발언으로 피해를 입었을 모든 사람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했다.

■일베는 어떤 곳 - 천안함 등 계기 결집 극우 성향 커뮤니티…약자·소수자 희롱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는 민주화 운동을 폄훼하고 약자·소수자를 비난하는 글이 많이 게시되는 극우 성향의 인터넷 커뮤니티로 분류된다. 2010년 인터넷 게시판 ‘디시인사이드’ 내 야구갤러리, 정치사회갤러리, 코미디프로그램갤러리 사용자들이 갈라져 나와 활동한 게 시초다. 회원은 대략 5만명으로 추산된다. 

초기에는 진보진영에 반감을 갖고 있는 젊은 누리꾼들이 모여들었다. 당시 인터넷포털 다음 ‘아고라’에서 통용되던 ‘쥐명박’ ‘쥐박이’ 등의 표현에 염증을 느낀 이들이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2010년 천안함·연평도 사건을 거치며 결집한 것으로 알려졌다. 초기 일베 회원들은 진보진영이 한국 사회의 성과로 꼽는 ‘민주화’를 조롱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치색을 표출했다. 이후 조롱은 혐오로 강화되고, 대상도 약자·소수자로 범위를 넓히면서 노골적인 극우 커뮤니티로 변했다.

일베에서 ‘민주화’란 단어는 ‘비추천’ ‘하향평준화’ ‘획일화’ ‘몰락’ 등의 의미로 쓰인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도 잦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표현은 단골로 등장한다. 최근에는 한 회원이 노 전 대통령과 코알라 사진을 합성한 사진을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 전광판에 내보내기도 했다.

일베에서는 여성이 ‘단골 놀잇감’이 된다. 지난 2013년에는 초등학교 예비교사인 일베 회원이 여자아이를 두고 성적 의미를 내포한 ‘로린이(로리타+어린이)’라고 불러 논란이 됐다. 명절에는 ‘사촌동생 인증 놀이’가 행해진다. 여성 친척의 몸을 몰래 찍은 사진을 게시판에 올리고 성희롱성 댓글을 다는 식이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들도 일베의 주요 공격대상이다. 희생자를 조롱하는 표현이 종종 등장하고 유가족을 비난하는 일도 공공연하게 이뤄진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2014년 광화문광장에서 단식투쟁을 벌이자 근처에서 피자와 치킨을 시켜 먹는 ‘폭식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지난 1월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일베 사이트에 대한 폐쇄를 검토해달라는 청원글이 올라왔다. 지난달까지 23만5000여명이 서명해 청와대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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