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점 테러’ 뚫고 개봉한 ‘82년생 김지영’ 김도영 감독 “우리 딸 시대엔 성차별이 전래동화로 여겨지길”

2019.10.28 21:28 입력 2019.10.28 21:30 수정

여권 신장되고 사회 발전했어도 관습·문화 등은 많이 안 변했다

서사적으로 숨막힌 전개보다는 담담·담백한 태도 보여주고 싶어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연출한 김도영 감독은 “이 영화를 계기로 나와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과의 공존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다”면서 “너무 울 것 같아서 아직 어머니와는 영화를 함께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연출한 김도영 감독은 “이 영화를 계기로 나와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과의 공존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다”면서 “너무 울 것 같아서 아직 어머니와는 영화를 함께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엔딩 크레딧이 다 오른 후에도 끝나지 않는 영화가 있다. 개봉 5일 만인 지난 27일 112만 관객을 모은 영화 <82년생 김지영>이다. 성차별과 여성 혐오의 그늘 속에서 평생을 신음한 영화 속 ‘보통 여자’ 김지영(정유미)은, 비슷한 삶의 경로를 지나온 영화 밖 수많은 여성들의 이름이 된다. 영화와 이에 공감한 관객을 향해 쏟아지는 근거 없는 악평과 혐오는, 영화가 다룬 문제적 현실이 결코 상상력에 기반한 가상이 아님을 반증하는 근거가 된다.

개봉 다음날인 24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82년생 김지영>의 김도영 감독(49)은 “여권이 신장하고 사회가 발전했다고 해도 우리가 몸담고 있는 문화와 관습, 사회적 약속들은 아직 많이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서 “우리 딸들의 시대에는 이런 일들이 ‘전래동화’처럼 여겨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독한 현실에서도 희망을 보는 그의 얼굴에는 영화 속 김지영처럼 말갛고 강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첫 장편 영화 연출작으로 <82년생 김지영>을 선택하기까지, 고민과 부담이 적지 않았다고 했다. 동명의 원작 소설과 영화를 둘러싼 논란 때문이 아니다. 그는 “좋은 작품을 망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많았다”며 “영화적 서사로 잘 풀어서 관객과 잘 소통할 수 있을지 두려움이 컸다”고 했다. 그러나 이야기가 가진 ‘생명력’이 그를 이끌었다. “이 서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응원을 나누는 운명을 지닌 것 같아요. 상업 영화의 틀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스스로 변모하려는 이야기의 의지를 느꼈어요.”

영화는 그렇게 활자 속에 누워 시대의 평균치로서 기능하던 김지영을 세상 속으로 일으켜 세웠다. 영화화 과정에서 그가 가장 주안점을 둔 것은 “담담하고 담백한 태도”다. 각자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원작 소설의 강점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서다. “서사적으로 숨막히게 끌고 가기보다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담백하게 다시 보게 하는 것, 그러면서도 어떤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 게 중요했죠.”

그는 8살, 5살 아들을 키우는 엄마이자 ‘경력단절’을 해야했던 배우로서의 경험을 투영하며, 또 배우 정유미와의 긴밀한 소통 속에서 ‘보통 여자’라는 추상에 구체성을 더했다. “우리가 느끼는 평범함은, 평균치 50이 아니라 0과 100이 혼재된 매 순간들의 총합에 가깝잖아요. 영화 속 지영이는 남편이나 직장 동료와 밝게 붕붕 떠서 대화를 하다가도, 그들이 떠나면 갑자기 훅 어두워져요. 이런 기복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구현해갔죠.”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살아 숨쉬는 지영의 ‘개인성’만큼이나 그의 삶에 담긴 시대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일도 중요했다. 원작에서는 각종 통계치가 동원됐다면, 영화에서는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는 다른 세대·조건의 여성들 이야기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지영과 어머니 미숙(김미경)을 지지하는 외할머니의 목소리, 남학생에게 위협받는 어린 지영을 돕는 여성 행인의 존재감이 각각 배우 예수정과 염혜란의 임팩트 있는 연기를 통해 강조했다. 김 감독은 “김지영뿐만 아니라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그 딸 세대까지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연결돼 있음을 보여주며 ‘더 넓은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원작을 쓴 조남주 작가가 팟캐스트 방송에서 한 말을 기억한다. “우리가 식초에 담긴 오이 같다고 하셨어요. 아무리 싱싱한 오이더라도 식초에 담긴 이상 피클이 될 수밖에 없죠. 남부럽지 않게 사는 지영이가 언어를 잃을 정도로 고통받은 것은, 가족들이 특별한 악인이라서가 아니에요. 우리를 ‘피클’로 만드는 사회의 시스템, 문화, 관습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영화에 악인이 없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지영이 맞서고 있는 건 결국 시대의 풍경들이잖아요.”

문제를 ‘보여주는’ 것에 집중했던 원작을 넘어, 영화는 문제를 ‘직면한’ 인물들 모습을 그린다. 지영은 전 직장상사가 차린 회사에서 일하고자 분투하고, 남편 대현(공유)은 이를 돕고자 육아휴직을 고민한다. 엄마 미숙은 아들만 편애하는 남편(이얼)에게 “왜 딸은 안 챙기냐”며 울며 맞서고, 동생 지석(김성철)은 아버지가 선물한 ‘편애의 소산’ 만년필을 지영에게 선물한다. “(성차별은) 사실 모두가 알고 있는 문제잖아요. 계기만 있다면 당연히 성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변화를 위한 아주 작은 실천이라도 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해요.”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배우로 활약했던 김 감독은 2017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에 영화연출 전공으로 재입학하며 본격적으로 영화감독의 길을 걷고 있다. 그는 “아직 차기작 계획은 없지만, <82년생 김지영>처럼 저와 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