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청소년 연예인, 상품 아닌 사람으로 활동할 수 있어야”

2020.01.04 18:27

진재연 한빛센터 사무국장, 김두나 희망법 변호사
“영국에선 ‘샤프롱’이라는 보호자가 촬영현장에서 보건·안전 문제를 감시·감독한다. 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인권침해 문제를 예방하는 역할이다”

“시청자 여러분께 큰 실망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어린이·청소년 출연자 보호를 위해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는 대책을 마련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지난해 12월 13일 김명중 EBS 사장이 자사 저녁뉴스에 나와 사과했다. 사흘 전 EBS <생방송 톡!톡! 보니하니> 유튜브 방송에서 성인 남성 출연자가 여성 청소년 출연자에게 언어·신체적 폭력을 가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김 사장은 공식 사과문에서도 “이번 사고는 출연자 개인의 문제이기에 앞서 EBS 프로그램 관리 책임이 크다”고 했다. 한 방송사만의 문제일까. 엠넷(Mnet) <프로듀스 X 101> 등 아이돌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조작 논란과 더불어 참가자들이 열악한 노동환경에 놓여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진재연 한빛센터 사무국장(왼쪽)과 김두나 희망법 변호사가 지난해 12월 31일 서울 상암동 한빛센터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진재연 한빛센터 사무국장(왼쪽)과 김두나 희망법 변호사가 지난해 12월 31일 서울 상암동 한빛센터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방송심의규정에 나온 어린이·청소년 출연 관련 내용은 ‘품성과 정서를 해치는 배역에 출연시켜선 안 된다’, ‘흡연·음주하는 장면을 묘사해선 안 된다’, ‘지나치게 선정적인 장면을 연출하도록 해선 안 된다’ 정도다. 방송사 제작 가이드라인도 마찬가지다.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이 아동·청소년의 기본권 보장과 노동시간 제한을 규정하고는 있다. 하지만 처벌조항은 없다. 학습권·건강권 등에 관한 세부 규정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프로텍트 101’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한빛센터),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희망법),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등 8개 단체가 참여하는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노동인권 개선을 위한 공동행동 팝업’이 주축이다. 팝업은 1월 14일 국회 토론회에서 ‘아동·청소년 연기자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학습권 보호 등을 규정한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 개정안 내용을 공개한다.

지난해 마지막 날 서울 상암동 한빛센터 사무실에서 진재연 한빛센터 사무국장(43)과 김두나 희망법 변호사(41)를 만났다. 이들은 “더 이상 ‘상품’이 아닌 ‘사람’으로서 안전하고 건강하게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원칙과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진재연 한빛센터 사무국장.

진재연 한빛센터 사무국장.

-왜 지금 ‘팝업’ 프로젝트인가.

진재연 “2018년 12월에 만나 딱 1년이 지났다. 처음에는 아동·청소년 연기자 노동환경 개선에 국한해서 시작했다. 허정도 배우님이 한빛센터에 제안해주셨다. 성인 연기자들도 초장시간 노동을 견디기 힘든데 아이들도 똑같이 밤새우고 굶고, 쉽게 방치되고 함부로 대하는 일을 목격했다고 한다. <프로듀스 X 101>에서 문제가 나타나면서 자연스럽게 아이들 연습생 문제까지 확장하게 됐다. 한국 사회에서 아이를 부모 소유로 생각하거나, 아동에게 인권이 있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던 것 같다. 연예인을 상품으로 취급하면서 아동·청소년 연예인이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아이돌을 꿈꾸는 사람들은 많지만 이 직업을 면밀히 들여다보는 성찰도 없었다. 원하는 아이들이 많으니까 이 시장에서는 함부로 해도 된다는 인식이 팽배한 듯하다.”

-실태조사를 통해 확인한 바가 있다면.

진재연 “지난해 5~6월 두 달간 아동·청소년 연기자 104명을 만났다. 연기학원 앞에 부스를 차리기도 하고, 예술중·고에 공문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과정 자체가 쉽진 않았다. 공통적으로 드라마 현장의 장시간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고, 대기시간이 너무 길다고 이야기했다. 촬영시간을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아침 10시에 와서 자정에 촬영한 경우도 있다. 더 심각한 건 엄마들 사이에서 촬영시간을 물어보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는 것이다. 문제를 제기하면 ‘블랙리스트’에 오른다는 말이 암묵적으로 돈다고 한다.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현재의 보호장치는 어떻게 평가하나.

김두나 “구색만 있는 상황이다.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 규정이 잘 지켜지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 아이돌의 유튜브 방송 등에선 아동·청소년 멤버가 있는데도 밤샘 연습을 하거나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예술인복지법에도 인권보장, 산업재해 보험 가입 등이 포함돼 있긴 한데 선언적인 수준이다. ‘노력해야 한다’ 또는 ‘어떤 내용을 계약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기획사나 제작사를 실질적으로 제재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 더 이상 제작자나 감독의 마인드에 기대선 안 된다. 실질적 기준이 마련돼야 한다.”

-외국의 실정은 어떤가.

김두나 “외국과 비교해보면 한국은 아무런 조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국은 15세 이상과 미만으로 나눠 용역제공 시간을 제한하고 있는데, 발달과정 등 여러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기준이다. 외국에선 생후 몇 달부터 3세까지, 초등학교 입학 전 등으로 나누고 학기 중 기준까지 상세하게 규정한다. 미국 일부 주에서는 촬영현장에 현장교사를 파견한다든지 촬영 이후 보충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한다. 학습권이 중요한 기본권이라는 걸 사회적으로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동·청소년 배우의 보수를 부모가 임의로 처분하지 못하도록 재산권 보호 제도를 갖춘 국가들도 있다. 한국도 이러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김두나 희망법 변호사

김두나 희망법 변호사

-‘아동인권보호관’ 도입 방안을 제시했다.

김두나 “영국의 제도를 벤치마킹했다. 영국에선 ‘샤프롱’이라는 보호자가 촬영현 장에서 보건·안전 문제를 감시·감독한다. 여러 인권침해 문제를 예방하는 역할이다. 이들은 각 지자체에서 교육을 받고 라이선스를 얻는다.”

진재연 “실질적으로 현장을 바꾸려면 그곳에 누군가 있어야 한다는 거다. 허정도 배우님도 현장을 감독할 사람이 없으면 법을 제대로 만들어놓는다고 해도 어렵다고 하더라. 어떤 형태의 보호관이 필요할지에 대해서는 고민해 나가야 한다.”

-시민들이 힘을 보탤 수 있는 방법은.

진재연 “‘카카오 같이가치’를 통해 ‘프로텍터 101’ 캠페인을 하고 있다. 댓글을 달고 내용을 공유하면 100원이 기부된다. 최대한 많은 분에게 알리기 위한 목적이다. 공개방송 현장 등에서 오프라인 캠페인도 벌이고 있다. 저희 활동에 아동·청소년 예술인 당사자가 없다. (방송업계에서 활동을 이어가려면)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당사자가 있어야만 운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려는 분들과 저희가 만나 시너지를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김두나 “더 많은 시민이 감시자가 돼주셨으면 좋겠다. <보니하니>도 시청자들이 문제를 제기해 조명받게 됐다. 아이돌 팬덤도 살인적인 스케줄을 지적하기도 한다. 한국 드라마나 K팝이 국제적으로 영향력을 가지게 됐는데, 콘텐츠가 만들어지는 이면의 문제들도 함께 향상시켜야 하지 않나. 대중문화예술인들이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되지 않아 노동인권 침해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는데, 이런 고민도 지속될 필요가 있다.”


‘팝업’이 제안하는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 개정 방향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대상

1 건강권 보장을 위한 건강검사 및 심리상담, 심리치료 의무화

2 대중문화예술용역제공 시간 제한 및 야간 용역 제공 제한

3 학습권 보장을 위한 결석일수 제한, 학교 수업 불참 강요 및 중도자퇴 강요 금지

4 다이어트 및 성형수술 강요, 폭언·폭행·성희롱 행위, 악천후 등으로 인하여 보건·안전상 위험의 우려가 있는 경우인데도 대중문화예술용역을 제공하게 하는 등의 권익침해 행위 금지

5 재산권 보장을 위한 신탁제도 도입

6 인권보장을 위한 아동인권보호관 제도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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