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단기직 노동자에게 기술변화는 “기회” 아닌 “불안”…6배 높았다

2020.01.13 06:00 입력 2020.02.05 15:45 수정

②무인화의 허구

ㆍ일터에 신기술 도입 관련 노동자 1554명 인식조사
ㆍ정규직은 “불안” 28.6%, “기회” 31.5%…지위 따른 ‘불평등한 체감’
ㆍ음식·운송 노동자 절반가량이 일자리 불안…IT 분야는 “기회” 많아

지난 9일 LS산전 청주 1사업장 G동 2층에 설치된 ‘스마트 생산라인’에서 이 회사의 주력 제품인 전자개폐기가 생산되고 있다. 이곳은 축적된 데이터에 기반해 부품 공급부터 조립, 시험, 포장까지 자동화가 구축돼 있다. LS산전 측은 “스마트공장 도입 후 생산성은 60% 높아지고 불량률은 97% 떨어졌다”고 밝혔다.   이상훈 선임기자

지난 9일 LS산전 청주 1사업장 G동 2층에 설치된 ‘스마트 생산라인’에서 이 회사의 주력 제품인 전자개폐기가 생산되고 있다. 이곳은 축적된 데이터에 기반해 부품 공급부터 조립, 시험, 포장까지 자동화가 구축돼 있다. LS산전 측은 “스마트공장 도입 후 생산성은 60% 높아지고 불량률은 97% 떨어졌다”고 밝혔다. 이상훈 선임기자

기술 변화로 어떤 일은 사라지고 어떤 일은 생겨난다. 자동화가 진행돼도 사람이 할 수밖에 없는 일이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노동 현장에 기술이 도입되는 과정은 ‘사람’ 노동자의 삶보다는 이윤 동기에 더 많이 좌우된다. 자동화·무인화가 인간을 고된 노동에서 해방하려는 목적 때문에 추진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노동자가 기술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경향신문은 지난달 13~23일 민주노총과 공동으로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신기술 도입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알아보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기술 변화는 모두에게 동등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리 대비할 시간·경제적 여유가 있는 누군가에게는 기회일 수 있지만 하루하루 생계유지가 급한 이에게는 삶을 위협하는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녹아내리는 노동]임시·단기직 노동자에게 기술변화는 “기회” 아닌 “불안”…6배 높았다

설문조사는 온라인을 통해 실시했다. 한국노총, 시민단체 ‘직장갑질119’로부터도 도움을 받았다.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286명을 포함해 노동자 1554명이 설문에 참여했다. 이 중 유효응답 1493개를 분석했다.

고용이 불안정하고 연령이 높을수록 기술 변화로 인해 소득이 줄고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란 불안감이 컸다. 임시·단기직 노동자의 50.7%가 지금의 기술 변화가 자신에게 기회(8.5%)가 아닌 불안감을 주는 요소라고 답했다.

반면 정규직(무기계약직 포함) 노동자는 기술 변화가 불안감(28.6%)보다 기회(31.5%)를 준다고 생각했다. 20·30대는 기술 변화로 인한 불안감보다 기회에 무게를 뒀지만, 40대 이상에서 그 비율은 역전됐다.

직업별로도 차이가 컸다. 무인 주문기 설치 등으로 이미 일자리 감소가 현실화하고 있는 음식·서비스직(47.7%)이나 자율주행차로 위협받는 운전·운송 관련 노동자(43.9%)들은 일자리가 사라질 거란 두려움이 컸지만, 정보·통신 분야 노동자들은 기회라는 응답이 55.7%에 달했다.

변화에 대비하기 위한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데 드는 비용은 대부분 개인이 부담(79.1%·중복응답)하고 있었다. 그나마 정규직들은 회사에서 지원받는 경우가 18.9%로 상대적으로 많았지만, 임시·단기직 노동자는 회사 지원을 받는 사례가 2.2%에 불과했다.

고용이 불안정하고 소득이 적을수록 ‘열심히 일해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에 노동의 의미를 두는 경향이 강했다. 고소득·정규직일수록 ‘일과 삶의 균형(워라밸)’에 노동의 의미를 더 뒀다.

■ “신기술도입으로 소득 감소” 20대 7.8%, 60대는 39.7%…연령 높을수록 불안

[녹아내리는 노동]임시·단기직 노동자에게 기술변화는 “기회” 아닌 “불안”…6배 높았다

김모씨(53)는 매일 오후 8시면 홀로 사는 집이자 가게인 당구장 문을 닫고 출근한다. 8년째 대리운전기사로 일하는 그의 출근은 거리에서 휴대전화로 대리운전기사 애플리케이션(앱)을 켜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튿날 오전 2시 무렵 마지막 손님을 내려주고 주변 PC방에서 첫차가 다닐 때까지 2~3시간을 때우다 당구장으로 돌아와 잠든다. 김씨가 주말도 없이 일해 버는 돈은 용역계약을 맺은 업체에 내는 수수료를 제하면 월평균 200만원이 된다. 업체가 난립해 요금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대리기사 일을 시작할 때보다 버는 돈이 오히려 줄었다. 부업으로 시작한 당구장에는 하루 한 팀도 안 오는 날이 많다.

김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간 첫 직장을 월급이 너무 적어 나온 뒤 보험영업, 택시운전, 장사, 건설현장 일용직 등 닥치는 대로 했다. 하지만 모아둔 돈이 없어 노년에도 계속 일해야 할 처지다. 그나마 하던 대리기사 일도 못하게 될까 두렵다. 김씨는 “머지않아 자율주행차가 상용화된다는데 그러면 대리기사는 필요 없지 않겠냐”며 “더 벌 수 있고 안정적인 일을 하려면 직업전문학교라도 다녀야 하지만 여유가 없다”고 했다.

김씨는 소득이 낮고, 고용이 불안정할수록 기술변화로 인한 불안감이 큰 대표적 사례다. ‘인공지능(AI), 로봇 등 기술발전이 고도로 진행되면 현재 종사하는 일자리가 사라질까’란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비율은 기간제(45.1%), 임시·단기직(42.3%), 종속적 자영업자(39.6%), 정규직(30.1%) 순이었다. ‘기술변화가 당신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느냐, 불안감을 주느냐’는 물음엔 정규직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안감’이라는 답변이 많았다. ‘신기술 도입이 소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는 질문에는 정규직의 13.7%가 소득이 ‘감소했다’고 답했는데, 임시·단기직은 66.2%가 감소했다고 밝혔다.

연령별로는 신기술 도입으로 소득이 감소했다는 답변이 20대(7.8%), 30대(9.6%), 40대(19.8%), 50대(24.5%), 60대 이상(39.7%)으로 갈수록 많았다. 일자리 감소 답변도 비슷한 추이를 보였다.

기술변화에 대한 인식차는 ‘이직 시 최우선 고려요소’에 대한 답변차로 이어졌다. ‘고용안정’을 꼽은 비율은 임시·단기직(70.0%), 종속적 자영업자(58.2%), 기간제(51.1%), 정규직(31.5%)으로 차이를 보였다. 20대, 30대가 각각 ‘자율성’과 ‘고임금’을 최우선하겠다고 한 반면 40대 이상은 ‘고용안정’을 택했다.

기술변화에 대한 두려움은 직군별로도 갈렸다. 운전·운송, 건설, 기계, 음식·서비스 등의 직군에서 우려가 컸고, 정보·통신, 문화·예술, 사회복지·종교 등에서는 상대적으로 불안감이 작았다.

고용 안정성과 소득에 따라 노동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도 달랐다. 2017년 1월 독일 노동사회부가 발간한 ‘노동 4.0 백서’의 구분을 끌어와 노동에 대한 7가지 가치관 중 선택하게 한 결과 정규직이고 소득이 많을수록 ‘일과 삶의 균형을 찾고 싶다’는 응답이 많았다. 모든 집단에서 ‘워라밸’을 가장 많이 택했지만, ‘열심히 일해 풍요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응답의 경우 고용이 불안정하고 소득이 적을수록 높아지는 특징을 보였다. 저임금·불안정 노동자일수록 소득을 늘리기 위해 이직과 부업을 많이 하는 현상도 확인됐다.

노조가 있으면 이직·부업·신기술 습득을 적게 하는 경향도 드러났다. 노조 유무에 따라 각각 이직 경험률은 64.3% 대 79.4%, 부업 여부는 10.4% 대 21.1%, 신기술 습득은 52.2% 대 61.9%로 차이를 보였다. 노조가 일방적 기술 도입을 막는 완충작용을 하거나 고용 안정성을 뒷받침함으로써 노동자들의 불안감이 줄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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