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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상처를 모두의 과제로 풀어갈 ‘차별금지법’

2020.01.28 06:00 입력 2020.01.31 14:05 수정

“나중에” “검토” 미룬 14년…모두의 인권 보호도 미뤄졌다

남녀고용평등법 등 진전 있었지만 개별적 대상의 ‘차별 금지’만 해당

일상적인 차별·혐오는 보호 못해…모든 이 지키는 ‘차별금지법’ 필요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경북 구미의 반도체업체 KEC 생산직군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과 달리 관리자로 승진할 수 없었다. 입사를 더 늦게 한 남성 노동자들이 관리자 등급에 올라도 여성 노동자들은 사원에 머물렀다. 남녀 간 연 임금격차는 최대 수백만원까지 벌어졌다. 회사는 “여자는 회사 정책상 안된다. 남자는 집안의 가장이다”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올해 1월 KEC 생산직군에서는 창사 50년 만에 여성 노동자 2명이 관리자 등급이 됐다. ‘남녀고용평등법’을 근거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내고 사측을 고소하는 등 행동에 따른 변화다.

여성 노동자 이종희씨(39)가 말했다. “남녀고용평등법을 알고 나니까 여성들이 처한 억울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깨닫고 정확하게 문제제기를 하게 됐어요. 법이라도 기대 사측에 ‘왜 안 지키냐’고 할 수 있잖아요.”

차별을 줄인 근거가 된 남녀고용평등법은 ‘개별적 차별금지법’에 속한다. 개별적 차별금지법이란 특정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금지·시정하도록 하는 법이다. 개별적 차별금지법이 생기면서 일부는 차별을 이야기하고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이 법은 모두가 아닌 일부만을 대상으로 한다. 다른 이유로 차별을 겪는 사람들을 보호하지 않는다.

차별은 누구에게든 향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선 주류인 사람이 다른 어떤 면에선 소수자로 차별받는다. 지방대 출신의 대기업 정규직 직원은 정규직이란 특권을 누리면서 학벌 차별을 겪을 수 있다.

정부와 정치권은 14년째 차별금지법 제정을 두고 “검토” “사회적 합의” “나중에”라는 말만 반복한다. 차별금지법에 관한 논의·토론 과정은 빠진 채 차별금지 사유에 ‘성적지향’을 포함할지만 쟁점화했다. 반대 세력의 표만 의식했다. 모든 이를 향한 차별에 눈을 감으면서 모두의 인권이 지연됐다.

자신의 소수자성을 숨기지 않고 차별과 혐오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회를 이루려 한다면 차별금지법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야 한다.

■ 말 못하는 나만의 상처를 모두의 과제로 풀어갈 ‘차별금지법’

차별금지법의 필요성

고용·교육 등 영역서 출신·학력 등 다양한 차별 없앨 기본 틀 세워
‘나도 차별받았다’ 말할 수 있게 되고 서로 차별 않는 계도 효과도
차별금지법 마련 땐 혼자 억울한 사람 없이 사회적 차원 접근 시작
미국 ‘간접차별’도 주목…글로벌 기업들 “다양성 포용, 혁신 촉진”

청각장애인 정선아씨(31)는 ‘장애인차별금지법’에 근거해 권리를 찾았다. 정씨는 지난해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 로이킴 콘서트에 가려 했다. 그는 콘서트 주최 측에 공문을 보내 수화통역사를 대동해야 한다고 알렸다. 주최 측은 정씨가 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수화통역사를 무료로 입장시켜줬다. 정씨가 전 회사에서 맡았던 ‘웹 접근성’ 업무도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된 뒤 생겨난 것이다. 웹 접근성 업무란 시각장애인이 웹을 사용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각종 지원을 하는 작업을 뜻한다. 정씨는 지난해 미국을 여행하면서 야구장 스크린 자막으로 편하게 야구를 즐기기도 했다. “예전엔 장애인이니까 도와달라고 무작정 부탁해야 했다면 지금은 ‘법’을 이야기하며 대우해달라고 말할 수 있어요.”

KEC 여성 노동자들과 정씨 사례는 각각 남녀고용평등법과 장애인차별금지법이라는 개별적 차별금지법으로 권리 구제가 된 경우다. 이들은 법을 근거로 차별 피해를 보상받았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차별을 줄여온 흐름에서 한 단계 더 도약하는 길이 된다. 고용, 재화·용역 공급이나 이용, 교육 등 영역에서 나이, 출신지, 학력, 성 정체성 등 다양한 범주에서 이뤄지는 차별을 ‘포괄적’으로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혜인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차별금지법은 다양한 영역에서 벌어진 차별을 어떤 방식으로 사회가 풀어야 할지를 두고 기본 틀을 세워준다”고 했다.

차별금지법은 사회의 ‘차별·특권 감수성’ 수준을 높이는 사다리가 될 수 있다. 차별금지법은 차별하면 안된다는 원칙을 정하고, 영역별로 차별 유형을 구체화한다. 이전엔 차별인 줄 몰랐던 언행, 관행이 차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알고 보니 나도 차별받았다’며 문제를 말할 수 있는 ‘언어’를 갖게 된다. 이런 변화는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전후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건수 추이를 보면 잘 나타난다. 장애를 근거로 한 인권위 진정 비율은 법 제정 전에는 약 14% 수준에 그쳤지만 제정(2007년) 이후 40%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류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은 “차별이라고 명명되기 전까지는 어느 개인에게 차별인 게 사회적으로는 차별이 아닌 것이 된다. 차별금지법의 1차 기능은 사람들에게 무엇이 차별인지 확인시켜준다는 점에 있다”고 말했다.

시민들이 차별을 하지 않게 만드는 계도 효과도 생긴다. 일본에서 2016년 ‘헤이트스피치법’(혐오표현금지법)이 시행되고 1년 뒤 극우단체 시위가 이전보다 절반 가까이 줄어든 게 그 예다. 이 법에는 처벌 조항이 없지만 혐오표현의 구체적 정의와 시정 방식이 담겼다. 박한희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헤이트스피치 억제법은 차별금지법처럼 선언적 법이지만 법 제정 이후 효과가 있었다는 연구가 있다”고 말했다.

차별금지법은 여러 사회 제도와 관행에 스며든 차별에도 대응할 수 있게 한다. 차별은 개인 간 이뤄지기도 하지만 제도와 관행에서 비롯되는 경우도 많다. 지난해 말 휴가 중 성전환 수술을 해 남성 성기를 제거했다는 이유로 심신장애 3급 판정을 받아 전역을 통보받은 육군 부사관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됐더라면 많은 성소수자가 성 정체성·성적지향에 따른 차별 없이 군 복무를 하리라고 전문가들은 본다. 군인권센터에 따르면 차별금지법이 제정된 미국에서는 약 1만5000명의 성전환 군인이 복무 중이다.

기업이 정리해고 기준을 정할 때 부부사원 중 1인을 대상으로 하거나 직원을 채용할 때 업무수행에 필요한 조건이 아닌데도 ‘키 170㎝ 이상’ 등 여성이 충족하기 어려운 조건을 제시하는 제도·관행도 차별이다. 조 변호사는 “사회의 차별적 관행에 따른 차별이 발생했을 때 가해자 한 개인을 강력하게 처벌하는 것으로 차별은 해결되지 않는다. 차별금지법은 사회적 차원에서 재발방지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한다”고 말했다. 미류 위원장도 “차별금지법이 마련된다면 차별에 대한 사회적 차원의 접근과 논의가 시작될 수 있다”고 했다.

차별금지법은 새로 나타나는 차별 양상에 관한 논의를 이끌기도 한다. 차별금지법을 만든 주요국들은 차별 개념을 가시적·직접적인 것에서 비가시적·간접적인 것으로, 특정 영역에서 광범위한 영역으로 확장해왔다. 미국은 차별금지법의 일종인 민권법이 제정된 뒤 ‘간접차별’ 개념이 생겼다. 1960년대 미국 고용주들은 객관적인 기준을 내세워 민권법의 차별금지 조항을 피해갔다. 여성과 소수인종은 고용에서 차별을 받았다. 미국 대법원은 민권법에서 명시한 차별뿐 아니라 형식상 공평하지만 차별적으로 작용하는 이 같은 고용 행태를 금지시켰다. 이때 등장한 게 ‘불평등효과이론’(간접차별)이었다.

영국도 2006년 개별적 차별금지법을 통합한 ‘평등법’을 만들면서 ‘복합차별’을 포함시켰다. 복합차별은 차별금지 사유에 들어간 두 가지 이상의 정체성이 결합된 사람이 차별을 받았다고 주장하면, 각각의 정체성에 따른 차별을 입증하지 않아도 차별받은 것으로 보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아시아계 여성은 아시아계나 여성으로서 차별받았다고 입증하지 않고 ‘아시아계 여성’이어서 차별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법과 지침을 만들어 차별을 줄이려는 움직임은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다. 글로벌 기업들도 차별금지 정책을 주요 운영 방침으로 삼는다.

미국 매체 포천이 2017년에 선정한 500대 기업 중 91%가 성적지향을, 83%가 성별 정체성을 근거로 한 차별을 금지하는 정책을 시행 중이다. 구글코리아 측은 2018년 SOGI법정책연구회가 발간한 ‘성소수자 친화적 직장을 만드는 다양성 가이드라인’에서 차별에 반대하는 방침에 대해 “여성과 남성, 성소수자, 다른 인종,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같이 있을 때 훨씬 좋은 아이디어가 나와 회사에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 법적 규범 없이는 실질적인 변화가 이뤄지기 힘들다고 본다. 김지혜 강릉원주대 다문화학과 교수는 저서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실질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차별이 발생하지 않도록 무언가를 ‘하지 말아야 하는’ 수준을 넘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적극적 조치 또한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 목사가 교회서 반동성애 발언하면 잡혀간다?…
인권위 등 비사법적 기구 통해 시정 조치할 뿐


차별금지법 ‘오해와 진실’
‘동성애 조장’ ‘다수 차별’로 왜곡
“말 맘대로 못한다” 불안 조장도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오해와 왜곡된 정보가 제정을 더디게 한다. 대표적인 게 ‘동성애 조장’이다. 차별금지법은 동성애를 조장하는 법이 아니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경향신문과 통화하면서 “차별금지법이 동성애를 ‘조장’하려면 제정 이전에는 동성애라는 정체성이 없었는데 제정 이후에 영향을 받아 그 정체성이 생겨야 한다”며 “차별금지법을 제정한 어떤 나라에서도 동성애자 수가 증가했다고 나온 바 없다”고 말했다.

차별금지법이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 등 일부 사회적 소수자만을 배려하기 위한 법이라는 인식도 있다. 이 집단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차별금지법을 ‘다수에 대한 차별’이라고 느낀다.

차별은 소수 집단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사람은 성별, 학력, 지역, 성적지향, 장애·질병, 경제력, 외모, 나이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갖고 살아간다. ‘남성 또는 여성은 이래야 한다’처럼 정체성별로 사회적으로 형성된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영향을 받는다. 고정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은 차별받는다. 차별은 언제든 누구에게나 향할 수 있다.

박한희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차별금지법에는 성별, 언어, 종교, 성적지향, 용모, 직업조건 등 20개가 넘는 차별금지 사유가 규정돼 있다. 법안 정식 명칭도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라며 “차별금지법은 모든 시민이 어떤 사유로든 차별받지 말자는 법안”이라고 했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말도 마음대로 못하게 된다며 불안을 부추기는 사람도 있다. 일부 개신교에서는 ‘목사가 교회에서 반동성애 발언만 해도 잡혀간다’며 교인들을 선동한다.

전문가들은 차별 행위를 한 사람을 형사처벌하도록 하는 법안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발의된 적이 없다고 했다. 조혜인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지금까지 발의된 법안에선 차별 행위가 발생했을 때 국가인권위원회와 같은 비사법적인 기구를 통해 시정 조치하게 돼 있다. 법원에 가더라도 민사적인 결정을 통해 다루도록 한다”고 설명했다. 박 변호사는 “지금까지 논의된 법안에서는 차별받은 사람이 인권위 등 국가기구에 신고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주는 경우에만 형사처벌 조항을 두고 있다”고 했다.

홍 교수는 혐오표현 금지법과 차별금지법을 혼동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혐오표현은 공개된 공간에서 불특정 다수를 향해 공개적으로 발언하는 행위다. 서울역광장에서 ‘여성은 집에서 애나 봐라’와 같은 발언을 하는 경우가 이에 속한다. 같은 발언을 회사에서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하면 ‘차별 행위’다. 홍 교수는 “차별금지법이 금지하는 혐오표현은 고용, 교육 영역에 한정돼 있다”며 “서울역광장에서 혐오표현을 하는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문제는 차별금지법 논의와는 다른 수위”라고 말했다.

국가인권위원회법에도 차별 행위에 대한 구제 조치 방안이 규정돼 있다. 차별금지법은 차별 행위를 구체적으로 담고, 시정 방식이 권고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권위법과 다르다. 헌법의 평등권 조항은 선언적이다. 차별금지법은 헌법과 달리 차별이 실질적으로 시정될 수 있도록 정의, 시정 방식, 정부의 의무 등을 구체화한 법률이다. 홍 교수는 “인권위법에는 어떤 행위가 차별인지 판단기준이 구체적이지 않다보니 인권위 해석에만 맡겨져 있다. 지금으로선 ‘차별하면 안된다’ 수준의 추상적인 말뿐”이라고 했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고 차별이 사라지느냐는 물음도 곧잘 나온다. 전문가들은 차별금지법이 완전히 차별을 없앨 수는 없지만 사회에서 차별을 보다 잘 알아차리고 이야기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기능한다고 했다.

조 변호사는 “차별금지법은 우리 사회가 이런 부분(언행, 제도, 관행 등)은 차별로 다룰 것이라는 걸 제시한다. 차별 이야기를 사회에서 잘 들리게 하면서 개선하는 판을 만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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