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스톡턴 시의 기본소득 실험…“현금 줬더니 더 나은 일자리 구해”

2020.02.26 06:00 입력 2020.02.26 16:26 수정

“기본소득 받은 2%만 구직 단념…더 나은 일 구하는 데 쓴다”

현실화되는 기본소득

지난해 2월부터 기본소득 실험을 진행 중인 미국 캘리포니아주 스톡턴 시에서 마이클 텁스 시장(30·맨 뒷줄 왼쪽)이 어린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 스톡턴시 제공

지난해 2월부터 기본소득 실험을 진행 중인 미국 캘리포니아주 스톡턴 시에서 마이클 텁스 시장(30·맨 뒷줄 왼쪽)이 어린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 스톡턴시 제공
■ ‘내일’과 ‘내 일’을 잇는 사회적 대화를 시작하자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경계가 허물어지는 일과 삶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경향신문이 ‘녹아내리는 노동, 내:일을 묻다’ 기획 시리즈를 시작한 뒤 줄곧 던진 질문이었다. 우선 ‘일하는 모두를 위한 사회안전망’이 필요하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사회복지제도는 사용자·근로자의 일대일 고용관계를 기초로 만들어져 그런 관계에 속하지 않은 대다수 일하는 사람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데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가장 기본적인 안전망은 일하다가 다치거나 죽지 않을 ‘안전’과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 정도의 ‘소득’이다. 플랫폼 경제의 특성상 노동자가 여러 플랫폼을 통해 일한다는 이유로 기업들이 노동자의 산업재해 책임을 지지 않는 현실을 고쳐야 한다. 다중추돌 교통사고의 책임 비율을 나누는 것이 가능하다면, 한 노동자에 대한 여러 사용자의 산재책임 비율을 나누는 것도 가능하다.

크라우드웍스 작업자, 배달노동자 같은 플랫폼의 일감 노동자만이 아니라 웹소설을 쓰는 프리랜서, 영세 자영업자에 이르기까지 일하는 모든 이가 일거리가 없어지거나 가족 돌봄을 해야 할 때를 대비한 안전장치도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근로자’에게만 주어지는 고용보험 혜택을 일하는 모든 사람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논의해볼 수 있다.

노동연계 복지만으로 촘촘한 사회안전망을 만들기는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 현실이다. 전통적인 안전망의 확대뿐만 아니라 기본소득 논의가 병행될 필요가 있다. 기본소득은 노동시장의 공식 영역에서 배제된 가사·돌봄 노동을 성평등하게 배분하고, 노동자에게 ‘시간주권’을 부여해 기술변화에 적응할 재교육 접근을 용이하게 할 수 있다. 기본소득은 기존 안전망의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로서 노동자의 교섭력을 전반적으로 강화할 수 있는 방안으로 여겨진다.

끝으로 이런 논의를 전사회적으로 하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국가와 정치의 역할과 관계있다. 노사정이 ‘노동 4.0’이라는 사회적 대화로 문제를 해결해온 독일의 사례가 좋은 참조점이 될 수 있다.



앤디 스턴은 15년 동안 전미서비스노동조합(SEIU)을 이끌며 조합원 220만명의 미국 최대 서비스노조로 자리매김시킨 인물이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의료보험 개혁 법안 ‘오바마케어’를 통과시키는 데도 기여했다. 2010년 노조를 떠나 5년간 노동의 미래를 연구한 그가 저서 <노동의 미래와 기본소득>을 통해 밝힌 견해는 이렇다. “기술로 인해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며, 이에 따라 향후 15~25년 사이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정책적 해법이 강구되어야 한다.”

그가 ‘해법’으로 내세우는 것은 보편적 기본소득이다. 노동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주기적으로 일정한 액수의 돈을 나눠주자는 것이다. 평생 노동운동에 헌신한 그가 ‘노동과 소득 분리’를 주장하게 된 것은 이런 결론 때문이다. “경기가 회복돼도 일자리와 임금은 늘지 않는다. 미국에서 더 이상 일자리와 임금만으론 중산층을 지킬 수 없다.”

■ “이제 우버 그만 뛰어도 되는 거야”

‘당신에게 기본소득이 보장된다면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쓰인 문구를 담은 대형 포스터가 2016년 스위스 기본소득 도입 국민투표를 앞두고 제네바 플랭팔레 광장에 설치된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당신에게 기본소득이 보장된다면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쓰인 문구를 담은 대형 포스터가 2016년 스위스 기본소득 도입 국민투표를 앞두고 제네바 플랭팔레 광장에 설치된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스톡턴시 기본소득 실험 중
주민 125명에게 월 500달러 지급
시행 8개월 시점서 수급자 조사
음식 구입에 총액의 40% 사용

빈곤과 범죄로 악명 높던 도시, 미국 캘리포니아주 스톡턴은 최근 기본소득 실험으로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30세의 시장 마이클 텁스가 드라이브를 걸었다. 시 정부는 ‘시드(SEED·The Stockton Economic Empowerment Demonstration)’ 프로그램 을 통해 무작위로 선정한 주민 125명에게 지난해 2월부터 18개월간 매달 500달러(약 61만원)의 기본소득(guaranteed income)을 준다. 조건 없이 현금을 지급할 때 주민들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연구하는 것이다.

스톡턴시는 이 프로그램을 시행하며 “빈곤의 근본 원인은 현금 부족”이라고 못 박았다. 시드 프로그램 디렉터 수키 사므라는 지난 22일 경향신문과의 화상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게으르거나 일을 하지 않아서 가난해진다는 통념을 바꾸는 것이 이 실험의 중요한 목표”라고 말했다. “경제 전문가들은 ‘실업률이 떨어졌다’며 낙관적인 태도를 보이곤 한다. 하지만 지금 미국에서 실업률은 현실을 제대로 포착하는 지표가 아니다. 일의 수는 늘어나는지 모르지만 임금은 오르지 않고 일의 질은 떨어지고 있다. 두세 가지 일을 정신없이 하는데도 생활비를 충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면 그 사람들을 탓할 게 아니라 이 경제 시스템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매일 10시간씩 일하고도 쉬는 날마다 부업을 하던 한 여성 수급자는 월 500달러 기본소득을 받게 된다는 소식에 기뻐서 이렇게 소리쳤다고 회고했다. “세상에, 나 이제 우버 그만 뛰어도 되는 거야?”

수급자들은 돈을 어디에 썼을까. 시행 8개월 시점인 지난해 10월 스톡턴시가 내놓은 조사결과를 보면 지급된 총액의 40%는 음식 구입에, 25%는 여타 생필품 마련에 쓰였다. 조건 없이 돈을 주면 근로의욕이 떨어지게 된다는 통념이 무색하게 구직을 단념한 사람은 수급자의 2%를 넘지 않았다.

사므라는 “사람들은 이 돈을 일을 관두는 데 쓰는 게 아니라, 더 나은 일을 구하는 데 쓴다. 고장 난 타이어를 고쳐야 차를 끌고 일을 나갈 수 있다. 그 돈이 없어 일을 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시간제 일자리를 전전하던 한 남성은 “일당을 못 벌어도 생활을 지탱할 수입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일을 하루 쉬고 전일제 일자리를 위한 면접을 볼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 실험의 재원은 디지털 기술 변화를 이끌어온 페이스북 공동창업자 크리스 휴즈 등이 운영하는 ‘경제적 안정성 프로젝트(Economic Security Project)’가 내놓았다. 시 정부 자체 재원으로는 여력이 없다. 사므라는 “우리 목표는 주정부나 중앙정부가 최저소득을 보장하는 프로그램을 하루빨리 시행하도록 촉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험의 최종 결과는 2021년 발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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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금 누진성 강화로 재원마련 가능”

LAB2050 정책연, 국내 모델 제안
4대 보험 손대지 않고도 실현 가능
창업 등 노동시장 새로운 시도 열고
가사노동 등에도 보상 주어지는 셈

국내에서도 일자리 변화와 소득 불평등에 대응하기 위해 기본소득을 현실적 방안으로 논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녹색당과 시대전환, 기본소득당은 지난 12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기본소득제를 함께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10월 다음 세대 정책실험실을 표방한 LAB2050이 내놓은 ‘국민기본소득제: 2021년부터 재정적으로 실현 가능한 모델 제안’ 연구가 바탕이 됐다. LAB2050은 가까운 미래에 보편적 기본소득 도입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국내총생산(GDP) 일부를 기본소득으로 직접 재분배한다는 구상이다.

▶ 국민기본소득제 : 2021년부터 재정적으로 실현 가능한 모델 제안

연구소 구상대로 월 30만~65만원의 기본소득을 전 국민에게 나눠주려면 연간 약 187조~405조원이 필요하다. 연구소는 4대 보험에 손대지 않고도 소득세 비과세·감면 제도를 줄여 기존 세금의 누진성을 강화하고 아동수당·기초연금 같은 현금성 수당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했다. 개인 기준 연소득 4700만원 이하 소득계층이 이익을 얻도록 했다.

▶ LAB2050 당신의 기본소득계산기

연구소가 이 원칙에 바탕해 설계한 시행방안 중 지급 액수가 가장 낮고(월 30만원) 시행 시기가 가장 이른(2021년) 시나리오에 사례를 대입하면 다음과 같다. 외벌이로 소득이 연 1억원인 부부와 미취학 두 자녀가 있는 가구는 기본소득으로 연간 1440만원을 받는다. 기존에 받던 아동수당이 기본소득으로 대체되고 소득세 비과세 감면 혜택이 줄어드는 것 등을 감안해도 소득이 연 353만원 늘어난다. 연봉이 3500만원인 청년이 기초연금을 받는 65세 이상 부모와 함께 사는 가구는 소득이 168만원 늘어난다. 기본소득은 가구가 아닌 개인별로 지급되므로,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에 생계급여를 받지 못하던 사람들도 사각지대에서 벗어나게 된다.

LAB2050은 “소득 불안은 창업과 직업전환 등 노동시장에서의 새로운 시도를 가로막는 제약 조건”이라며 “늘어나는 프리랜서와 자영업자에게 기본소득을 줘 소득 불안정을 해소시켜 주는 것은 미래사회에 대비한 혁신 동력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 ‘일’보다 ‘삶’에 방점을

기본소득론자들은 산업화 시대 고용 중심의 사회보장 모델이 이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본다. 고용관계가 불명확한 일자리·일거리가 계속 생겨나는데, 이들을 기존 법과 제도에 맞추는 데 치중하는 사이 노동자들은 사회안전망을 빠져나가 방치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부족한 소득을 직접 보충해주는 것은 장시간 노동과 과로 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생계비가 충족되지 않는 상황에서 노동자는 최저임금이 올라도, 법정 노동시간이 줄어도 끊임없이 일거리를 찾아 나서며 ‘자기 착취’를 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사회가 가치를 매겨주지 않던 무수한 무급노동까지 ‘일’로 인정한다는 의미도 있다. 생산에 간접적으로 기여하지만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던 돌봄과 가사노동,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 구직활동, 창작, 자원봉사 등에도 보상이 주어지는 셈이다. 로봇과 인공지능이 사람의 일을 대체하는 시대에, ‘고용’ 바깥의 다양한 ‘일’들이 이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고 발상의 전환을 하면 모두의 ‘삶’이 좀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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