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반백의 노인장이 작심하고 쓴 ‘극한 노동 보고서’

2020.04.03 11:35 입력 2020.04.03 20:32 수정

임계장 이야기

조정진 지음

후마니타스 | 260쪽 | 1만5000원

노인 노동 르포르타주 <임계장 이야기>는 조정진씨가 일하며 써내려간 노동일지 10권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책에는 경비원 노조를 만들겠다고 모인 자리에서 나온 한 의원의 개회사가 인용된다. “집에서 따분하게 노는 것보다 일을 하시니 건강에도 좋고 용돈도 벌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노인 노동자의 현실과 괴리된 세간의 시선을 보여준다. 그는 현실 고발에 그치지 않고 경비업법 실행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서도 따끔한 비판을 한다.  후마니타스 제공

노인 노동 르포르타주 <임계장 이야기>는 조정진씨가 일하며 써내려간 노동일지 10권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책에는 경비원 노조를 만들겠다고 모인 자리에서 나온 한 의원의 개회사가 인용된다. “집에서 따분하게 노는 것보다 일을 하시니 건강에도 좋고 용돈도 벌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노인 노동자의 현실과 괴리된 세간의 시선을 보여준다. 그는 현실 고발에 그치지 않고 경비업법 실행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서도 따끔한 비판을 한다. 후마니타스 제공

봄이다. 동백이 지면 매화가 만발하고 그러고 나면 벚꽃이 핀다. 벚꽃이 지고 나면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 6월까지 꽃잎들을 토해낸다. 꽃송이 하나는 수많은 꽃잎을 매달고 있다. 하루 종일 꽃을 피워내고 하루 종일 꽃잎을 떨군다. 이렇게 낭만적인 봄꽃이 누군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쓰레기’다. 아파트 경비원에게 그렇다.

“사실 경비원에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중 반가운 것은 빗방울뿐이다. 눈이며, 꽃잎이며,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들은 모두 다 쓰레기다.” 고참 경비원에게 꽃은 봉오리로 있을 때 미리 털어내야 하는 존재다. 아예 피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떨어지는 꽃잎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비인간적’으로 느껴지는가. 그들이 처한 노동환경이 진짜 비인간적이다.

70세까지 일해야 생계 잇는 현실
‘늘공’서 ‘임시 계약직 노인장’으로
경비원·주차관리원·청소부까지
월화수목금금금 단순 노동 투잡
갑질에 울고 무더위에 쓰러지고
직접 겪어낸 고초, 생생한 기록

“꽃잎이 주차장에 나뒹굴면 그렇지 않아도 오래된 아파트가 더 지저분해 보여 집값이 떨어진다고 주민들이 난리를 치지 않던가? 꽃잎이건 뭐건 떨어지는 걸 바로바로 치우지 않으면 당하는 건 우리 경비원이야. 무더기로 쌓이고 무더기로 흩날리는 꽃잎들을 하루 종일 치워 본 사람이라면 내가 한 짓을 조금은 용서할 수 있을지 모르지.”

[책과 삶]반백의 노인장이 작심하고 쓴 ‘극한 노동 보고서’

<임계장 이야기>는 지방 소도시에 살면서 공기업 사무직으로 38년간 일하다 퇴직한 조정진씨(63)가 생계를 위해 시급 노동의 세계에 뛰어들면서 쓴 3년간의 노동일지를 모은 책이다. 임계장.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줄임말이다. 조씨가 버스터미널에서 일할 때 실제 주변에서 그를 부르던 이름이다.

조씨는 아파트, 빌딩, 버스터미널을 전전하며 경비원, 주차관리원, 청소부, 배차원으로 겪은 시급 일터의 팍팍한 현실을 담담히 써내려간다. 2016년 8월1일부터 2019년 3월31일까지 기록을 바탕으로 한 책에선 차마 실명으로 적을 수 없는 날것의 삶을 보여준다. 1장부터 4장까지 동명고속, 노을아파트, 대형빌딩, 터미널고속(모두 가명)을 거친 ‘임계장’ 이력을 따라가다 보면 이 사회의 낮은 곳에서 모두가 기피하는 일을 도맡아 하는 반백의 노동자들을 만나게 된다. 검표원, 콜센터 상담원, 편의점 알바생, 미화원 등 그가 거쳐간 일터들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도 새삼 환기한다. 우리의 빈곤한 상상력과 무지를 반성하게 만드는 경악스러울 정도의 생생한 기록이다.

“이제부터 하게 될 이야기는 고령층 비정규직, 그중에서도 은퇴 후 계약직으로 일하게 된 나의 이야기다. 은퇴자의 대부분이 70세까지 일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고, 나 역시 그랬다.”

베이비붐 세대인 조씨는 ‘늘공’ 공기업 정규직으로 일하다 2016년 60세의 나이로 퇴직했다. 가족은 전업주부인 아내와 출가한 장녀, 대학 3학년 아들이 있다. 당초 아들은 졸업 후 취업할 예정이었으나 로스쿨에 진학하려 해 노후 설계에 변수가 생겼다. 딸은 퇴직을 앞두고 결혼해 저축한 돈을 써버렸고, 퇴직금도 미리 당겨써 막상 받은 돈은 별로 없었다. 2010년 지방 소도시에서 광역시로 발령받아 거처를 옮기면서 부족한 집값을 1억5000만원의 주택담보대출과 추가적인 직장인 신용대출로 메워야 했다. 퇴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은행에선 퇴직과 함께 ‘신용’도 사라졌다며 즉시 상환을 독촉했다.

이렇게 책은 조씨의 퇴직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평생직장에서 20년 넘게 개인연금을 부으며 노년을 대비한 성실한 노동자였다. 그의 상황은 남 일이 아니라 나에게 그리고 지인에게 닥칠 수 있는 평범한 현실이라는 의미다. 한국 사회가 약간의 변수만으로도 언제든 극한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백발이 되어서도 핏발 선 눈으로 거친 생계를 이어가게 될 줄 몰랐다”는 그의 얘기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조씨가 일하던 아파트 경비초소의 모습이다.

조씨가 일하던 아파트 경비초소의 모습이다.

조씨는 생활정보지의 구인광고를 뒤적였다. 애초에 나이 많은 사무직을 구하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60대 ‘어르신’에게 허락된 일자리는 단순 노무직뿐이다. ‘고다자’, 고르기도 쉽고 다루기도 쉽고 자르기도 쉬운 일자리들이다. 그는 은퇴 후 첫 직장으로 작은 회사의 배차 계장이 됐다. 업무의 부당함을 항의했다가 25년간 지켰던 일자리에서 쫓겨난 전임자에게 인수인계도 받지 못한 채 일을 시작한다. “차 출발하는데 쳐죽으려고 환장했냐? 이 ○○ 새끼야?”라는 욕설에도 익숙해지고, 잔반이 당연하게 올라오는 4000원짜리 눈칫밥에도 금방 적응했다. 그는 세 사람이 해야 할 일도 기어코 혼자 해내는 데 성공하지만, 3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탁송 작업을 하다 허리를 다친다. 사흘의 질병휴가를 신청하자 곧바로 해고되고 만다.

아픈 허리를 끌고 일주일 만에 다시 아파트에 취직했다. 경비원으로서 각종 쓰레기 분리수거, 주차관리, 소음 분쟁, 주민들의 갑질, 각종 잡역과 심부름 등 수십가지의 ‘비정형적 업무’를 하게 된다. 최저임금 핑계로 7명이 하던 일을 혼자 하게 됐다. 겉으론 평범해 보이는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보급 없이 나서는 전쟁터’다.

알고 있고 가까이에서 보는 공간에서 조씨가 겪은 일들에 숨이 턱턱 막힌다. 이를테면 멋쟁이 할아버지가 재활용품 적치장에 옹기 항아리를 태연히 두고 간다. “여기에 버리시면 안된다”고 하면, 인자한 눈빛으로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가져가라고 일부러 여기 놔두는 거”라고 말한다. 대놓고 아파트 현관 앞에 쓰레기를 버리고 가는 사람에게 종량제봉투에 담아 버려달라고 하면, 1000원짜리 지폐를 내던지고는 가버린다. ‘네네 치킨’이 되어서 온갖 심부름을 하는 것은 예사고,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진부한 레퍼토리를 실제로 듣기도 한다. 음식물통을 수압을 강하게 해 씻었다는 이유로 입주민에게 ‘갑질’을 당하고, 길고양이가 튀어나와 여학생이 실신했다는 이유로 경위서를 쓴다. 동네 아이들의 장난으로 차단기 막대가 멈추는 ‘중죄’를 짓고 사과를 하면서는 눈물이 핑 돌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조씨는 격일제 근무 조건을 이용해 아파트에 이어 고층빌딩까지 월화수목금금금 투잡을 뛴다. 60대에 280만원을 벌기 위해선 24시간 쉬지 않고 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빌딩에선 ‘본부장 사모님’의 갑질로 해고되고, 아파트에선 자치회장의 심기를 거스른 죄로 재계약에 실패해 또다시 실업자가 된다. 이어 배차 계장으로 있을 때 사귀었던 ‘사부’의 소개로 터미널 보안요원으로 취직하지만, 결국 2018년의 혹독한 무더위 속에서 극한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다.

[책과 삶]반백의 노인장이 작심하고 쓴 ‘극한 노동 보고서’

“젊은이들 일자리도 없는 현실에
노인 비정규직들의 공통된 문제”
은퇴하면 모두가 만나게 될 세상
“더 나아질 수 있게” 따끔한 비판

조씨는 현재 신장과 허리에 손상을 입었고, 똥물에 젖은 쓰레기를 만지면서 얻은 피부병은 만성이 됐다. 그럼에도 7개월의 투병생활을 마치고 지난해 4월부터 다시 15층짜리 주상복합건물에서 경비원 겸 청소부로 일하고 있다. 일하면서 틈틈이 적은 메모를 본 지인의 권유로 병상에서 원고 2000장을 써 지난해 8월 출판사에 투고했다. 조씨는 2일 경향신문과의 전화인터뷰에서 “글을 쓰면서 직접 겪은 일 외에는 적지 말자는 원칙을 세웠다”면서 “그럼에도 한 사람에게 국한된 일이 아닌 노인 비정규직 노동자 모두의 공통된 문제”라고 말했다. 이어 “젊은이들 일자리도 없는 현실에서 은퇴한 사람들이 구할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는 없다고 봐야 한다”며 “대부분은 저와 비슷한 현실을 접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씨는 책을 준비하며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소금꽃 나무>, 조선소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현대조선 잔혹사> 등을 읽고 “나의 노동은 한낱 응석에 지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씨 같은 노동이 보편화된 현실도 사람이 죽고 다치는 노동 현장과 멀지 않은 극한의 현실이다. 그는 “주변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글이 짧아 알리지 못한다는 말들을 듣고, 차마 가족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얘기지만 책으로 펴내게 됐다”며 “모든 사람들이 일을 그만두고 만나게 될 세상이 더욱 나아질 수 있도록 힘을 보태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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